75년 전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해병대
상태바
75년 전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해병대
  • 이승준 기자
  • 승인 2020.02.19 16: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45년 2월 미군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 본토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일본을 공격하기 전에, 전쟁 계획자들은 미국 폭격기들을 일본으로부터 750마일의 타격 범위 안에 두는 서태평양의 작은 섬인 이워 지마를 잡기를 희망했다.

이를 위한 임무는 해병 3, 4, 5사단과 육군 147보병연대, 해군 5함대로 떨어졌다.

이우지마 포획 계획은 1944년 6월 15일 육공군과 해군이 섬을 폭격하면서 전개되었다. 이것은 75년 전인 1945년 2월 19일 군대가 오늘 섬에 상륙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섬의 무겁고 지속적인 폭격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그들만의 방어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약 11마일의 터널과 지휘통제 및 기타 기능을 위한 지하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우지마 미군에 의한 폭격은 지하에 은신해 있는 약 2만 1천명의 일본군에게 상대적으로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미국인들에게 설상가상으로, 많은 터널들이 수리바치 산의 경사면에 위치해 있었다. 일본군은 미끄러운 검은 화산 모래 위에서 큰 어려움을 겪으며 해변에 상륙한 미군과 내륙으로 진격하는 미군에 대해 포병, 소형 무기, 박격포 등을 발사했다.

공격함대는 7만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3개 해병사단과 다양한 형태의 450여 척의 해군함정, 그리고 수 천 명의 해군해군으로 구성되었다. 시베인들은 도로 건설에 전문가였고 섬의 3개 비행장을 열기 위해 필요했을 해군 기술자였다.

5주 동안 계속된 격렬한 전투로 해병대는 거의 7,000명이 사망하는 등 2만 5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사상자가 워낙 많아 한 달 뒤 육군 제147보병연대가 상륙해 물떼기 작전을 도왔다.

이 사진에서, 이오지마에서, 전사는 이오지마에서 전사다. 화염방사기로도 그일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75주년 기념일이 다가오자 퇴역한 해병은 그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던 악몽의 전투를 회상한다. (사진: 미국방부)
이 사진에서, 이오지마에서, 전사는 이오지마에서 전사다. 화염방사기로도 그일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75주년 기념일이 다가오자 퇴역한 해병은 그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던 악몽의 전투를 회상한다. (사진: 미국방부)

일본인들은 약 18,000명이 사망하는 등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인들을 항복시키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16명만이 포로로 잡혔다. 나머지는 실종자 명단에 올라 있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발적인 전투는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49년 마침내 항복할 때까지 두 명의 일본인 거류지가 섬의 동굴과 터널에 숨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 중 하나는 AP통신 사진작가 조 로젠탈에 의해 촬영되었다. 그의 사진에는 1945년 2월 23일 이우지마에서 미국 국기를 게양하는 6명의 미국인이 찍혔다. 마린 병장. 로젠탈 옆에 서 있던 빌 제노스트는 같은 순간을 영상에 담았다. 제노스트는 9일 후에 살해되었다.

국기 게양 이미지는 미국 우표에 실릴 정도로 강력했고,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해병대 전쟁기념관에는 대형 국기 게양 동상이 전시돼 있다.

많은 책들이 쓰여졌고, 이오지마 전투에 관한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이 중 3편은 배우 존 웨인과 포레스트 터커가 주연한 1949년작 이오지마의 모래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2006년작 두 편인 이오지마의 편지, 우리 아버지들의 편지 등이다.

미국은 1968년 이오지마를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오늘날, 일본 해상, 지상, 항공 자위대는 이 섬에 주둔하고 있다.

일본은 이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 중 하나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