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의 성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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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의 성주성 전투
  • 유진우
  • 승인 2019.08.02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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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성 복원공사현장(사진:유진우)
성주성 복원공사현장 (사진:유진우 기자)

취재 : 유진우

취재협조 : (주) 동신건설

120년간에 걸친 피비린내나는 내전을 종식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뇌내망상에 가까운 무모함으로 벌어진 7년 간의 <조·일전쟁>.

그 중 3차례에 걸쳐 격렬하게 벌어졌음에도 정작 전투의 무대였던 곳이 흔적도 없이 철거되어 주목받지 못한 곳이 있으니 바로 <사드 포대>가 배치되어 최근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성주군의 성주성( 星州城, 경북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516 )이다.

언론에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하게 진행되어온 성주성 복원공사 현장을 언론매체 중 최초로 본지에서 단독보도를 하게 되었다.

성주군과 동신건설의 적극적인 공정진행으로 현재 70%에 가까운 공정률을 보이고 있는 성주성 복원현장과 더불어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성주성 공방전을 다룬다.

 

들어가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정벌의 야욕으로 발발한 조·일전쟁( 임진왜란, 1592~1598 ) 기간 중 흔히 우리는 이순신 장군으로 대표되는 해전과 진주성·행주산성 전투 정도를 꼽는데 그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의 거의 전역이 전장으로 변해버린 이 대규모 전쟁에서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은 당연히 없을 것이고 특히 개전 초반에 신속하게 일본군에게 장악당한 경상도 지역에서는 홍의장군 곽재우 등을 비롯한 의병들이 주요 고을에서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초창기에는 120년이 넘는 내전을 통해 단련된 각 다이묘의 군대로 이뤄진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 위주의 전투를 벌여왔던 의병은 곧 수습된 관군과 연합하여 주요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읍성의 탈환에 나서는 수준에 이르렀다.

  당연히 일본군 입장에서는 각 읍성이 탈환되는 순간 보급로가 차단당하는 것이 불보듯 뻔하기에 방관할 수 없었지만 생각 외로 북진에 집중하느라 주요 주력부대가 한양 방면으로 전진배치되어있던 입장이라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입장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군과 의병의 성공적인 읍성 탈환작전이 때로는 난관에 부딪힐 경우가 있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할 성주성 전투다.

  오늘날에는 사드 기지( 소성리 )로 한창 시끄럽고 원래 참외로 유명한 경상북도 성주군( 당시에는 성주목 )은 가야산을 비롯한 험준한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분지로 예로부터 인근의 김천과 더불어 교통의 요지 중 하나이자 진주와 더불어 목사를 둔 큰 고을이었다.

  또한 삼국시대에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의지한 독용산성을 신라가 축성하는 등 그 전략적 중요성을 입증받은 고을인데 개전 초기 성주성을 비롯한 성주 지역이 그야말로 손쉽게 일본군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바람에 조선군으로서는 반드시 탈환해야하는 숙제를 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성주군의 치소라 할 수 있는 성주성을 장악한 것은 다름아닌 참전부대 중 가장 많은 병력을 거느리며 경상도 점령을 맡고 있던 모리 데루모토의 제7군으로 3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김천의 개령면에 본진을 설치한 뒤 보급로 경비 등을 맡고 있었는데 그 중 가문의 원로인 가쓰라 모토쓰나( 桂元綱, 1547~1628 )의 병력 1만명이 성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이 신속한 진격을 위해 주요 읍성을 장악한 뒤 일부 수비병력을 남겨둔 다음 주력부대는 신속하게 북진을 거듭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성주성에는 상당한 수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으니 그 중요성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하튼 개전 초반의 혼란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꾸준히 게릴라전을 통해 일본군의 후방을 괴롭히던 의병진이 관군 병력과 합류하여 마침내 읍성 탈환전에 나서게 되며 일본군의 중요 거점 중 하나인 성주성 역시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오늘날의 성주성

  필자가 전사를 쓸 때마다 가장 골치아픈 것이 바로 실제 전장에 대한 정보 부족이라 할 수 있다.
 죽주산성 전투의 경우 워낙 성의 훼손이 심각한 수준( 지금은 꾸준한 복원-정비 공사로 어느 정도 복구가 되었지만 )인데다 MBC 드라마 무신에서 문경의 연개소문 세트장을 활용한 묘사를 하는 바람에 실제 지형과 완전히 괴리되는 인식을 보강하기 위해 머리를 많이 쥐어짰던 추억이 있었던 탓이라고 해야할까?

1895년, 일제의 폐성령 발효 이후 전국의 읍성들이 철거되는 와중에 성주성 역시 그 화마를 피해가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덕분에 성주성 전투의 현장은 사라진 채 기록과 쌍충사적비만으로 성주성 전투를 추정할 수 있었지만 독자 여러분이 본 기사를 열람하는 시점에서는 이처럼 북문과 성벽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으니 2020년부터는 편안하게 성주성의 성곽을 산책하며 당시 전투를 보다 실감나게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사진:유진우)
1895년, 일제의 폐성령 발효 이후 전국의 읍성들이 철거되는 와중에 성주성 역시 그 화마를 피해가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덕분에 성주성 전투의 현장은 사라진 채 기록과 쌍충사적비만으로 성주성 전투를 추정할 수 있었지만 독자 여러분이 본 기사를 열람하는 시점에서는 이처럼 북문과 성벽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으니 2020년부터는 편안하게 성주성의 성곽을 산책하며 당시 전투를 보다 실감나게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유진우 기자)

  때문에 모처럼만의 전사를 다룬 본 기사에서 성주성 전투를 다루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실제 전장에 대한 충실한 설명을 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다른 지역의 읍성들과 마찬가지로 성주성 역시 극심한 시가지화로 인한 철거를 피할 수 없었고 성주군에서 적극적으로 복원에 나서지 않았다면 기껏해야 도로나 농경지로 변해버린 성터를 소개하며 그야말로 지루한 글이 될 뻔했을 것이다.

  하지만 2015년부터 비교적 재건이 용이한 성주읍 예산리 일원에 위치해 있던 북문과 성곽을 복원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고 예산이 확보된 성주군에서 마침내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굴조사 및 공정에 착수함으로써 성주성은 비록 일부나마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이 사업이 성주역사테마공원 조성의 일부라는 점이 좀 안타깝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기껏 확인된 읍성의 흔적조차 건물 신축으로 묻어버리는( 김해와 창원이 좀 심각한 수준 )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성주군에서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다는 점에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필자와 같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이런 사업을 옹호하고 알리는 것에 전력을 다해야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사진:유진우 기자)
(사진:유진우 기자)
성주성 북문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으로 복구되었다. 어지간히 큰 규모의 읍성이라도 보통 북문은 단층으로 이뤄진 경우가 많은 편이다. 성돌은 조선 초-중기 읍성들처럼 비교적 간단하게 다듬은 자연석을 쌓아올려 고증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사진:유진우 기자)
성주성 북문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으로 복구되었다. 어지간히 큰 규모의 읍성이라도 보통 북문은 단층으로 이뤄진 경우가 많은 편이다. 성돌은 조선 초-중기 읍성들처럼 비교적 간단하게 다듬은 자연석을 쌓아올려 고증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사진: 유진우 기자)

  따라서 필자는 성주성 전투를 소개하기에 앞서 기본적으로 복구가 이뤄지고 있는 성주성 북문과 성곽 공사현장을 한번 취재해보기로 결정했다.

  경상북도 성주군은 최근 김천이나 고령 등 인근 도시와의 교통로가 비교적 원활하게 연결된데다 도로 건설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어 넉넉잡고 3~4시간( 필자가 거주하는 대전 기준 ) 정도면 수월하게 당도할 수 있다.

  성주성 복원이 이뤄지고 있는 역사테마공원은 내비게이션에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516"으로 입력하면 손쉽게 이동이 가능하다.

  가는 도중 성의 서쪽 성곽이 위치한 구릉에 우뚝 선 성주여자중·고등학교 강당 건물이 보인다면 정확하게 찾아간 것이니 길을 헤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성주읍에 도착해 성터를 한번 둘러본 결과 현재 진행 중인 성주성 복원은 북문과 주변 성벽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토지 보상이 추가적으로 이뤄지고 예산이 확보된다면 서문까지는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서문이 있던 성주여자중·고등학교 교문 앞 교차로에는 성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출신 성주목사 제말과 사촌 제홍록의 공적을 기린 쌍충사적비가 이전되어 있어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현재 읍성의 복원 공정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필자로서는 많은 읍성의 복원 공사현장을 다녀봤지만 성주처럼 대규모로 이뤄진 곳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공사를 맡은 동신건설은 많은 문화재 복구 공사를 이뤄낸 업체로 그 동안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일단 성주성 북문이 위치한 예산리 일대는 험준한 능선이 펼쳐진 계곡으로 오늘날에는 마을이 들어서며 많이 경지정리가 이뤄진 상태지만 성주성 전투가 벌어질 당시에는 제대로 된 공성장비의 접근조차 어려울 정도의 험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성주성은 고려시대 조성되었던 토성( 고읍성 )을 조선시대 석성으로 개축하며 너무 넓어 방어하기가 어렵던 위치조차 방어에 유리하도록 고지대와 계곡 위주로 변경하기까지 한 덕분에 공성을 시도하고자 한다면 남문과 동문 일대의 평지로 한정되는 꽤 나쁘지 않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이는 합천의 대야성처럼 천변과 산악지대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쌓는 지형적인 방어를 우선시한 경우인데 이런 곳을 개전 초 지리멸렬하던 조선군이 그대로 일본군에게 바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조선 관군과 의병은 이 성을 끝내 탈환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필자는 공사가 이뤄지는 구간을 한번 빙 둘러보며 이 지역의 견고한 지형에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내었는데 북문 일대는 확실하게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도 쉽사리 공략이 어려운 곳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고 실제 본격적으로 공성전을 벌인 제3차 전투 당시에도 주 전장은 평지에 위치한 남문과 동문 일대였음이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북문 성벽 중 동북쪽으로 꺾이는 지점에는 임정사라는 사찰이 위치해 있는데 이 곳에는 당시 성문의 기둥을 꽂았던 문확석이 남아있고 당시 성벽의 동선을 따라 새롭게 쌓은 축대가 위치해 있어 성의 규모를 추정하는데 좋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동신건설의 현장소장에게 문의해본 결과 현재 공정은 연말 이후까지는 계속 이뤄질 것이며 예산상의 문제로 일단 북문의 단청 작업이나 성문을 제작해 달아놓지는 못했다는 추가적인 설명까지 들을 수 있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주요 지자체가 관광자원으로 읍성의 복원이나 정비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성주군의 성공적인 시공 사례를 토대로 꾸준한 복원이 이뤄져 필자와 같이 당시 전장을 찾아다니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다시 한번 기대해본다.

 
  경상도의 의병 봉기와 성주 탈환준비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카나가가 이끄는 제1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연이어 함락시키며 전쟁의 막이 오른 이후 4월 27일, 성주성까지 함락되며 개전한 지 불과 2주일 만에 경상도 일대의 주요 읍성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참담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120년에 걸친 내전을 통해 단련된 일본군에 비해 200년에 가까운 평화기를 누리며 그야말로 군기가 빠질대로 빠진데다 나태해진 조선군의 수준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었다.

  경상도 지역을 거의 장악한 일본군은 이 지역을 담당한 모리 데루모토의 제7군을 제외한 나머지 군단이 각자의 맡은 지역으로 이동했고 성주성 역시 보급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문제는 워낙 신속한 진격에 집중한 나머지 주요 읍성만을 점령하는데 그쳐 주 진격로 상에 위치하지 않은 고을의 의병들이 봉기하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었다.

  이는 주요 행정관들이 도주하거나 지배체계가 붕괴되면 자연히 백성들은 새로운 지배자에게 복속되는 일본의 시각으로 조선을 바라본 결정적인 실책으로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주하고 국가 체계가 그야말로 엉망이 되었음에도 도리어 백성들이 분연히 무기를 들고 일어나 싸우는 뜻밖의 변수라 할 수 있었다.

  특히 전라도 지역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던 모리 가문의 일족인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제6군과 이를 지원하는 제7군은 5월을 기점으로 거병한 곽재우 의병군에게 의령 정암진 나루에서 일격을 얻어맞았고 그 보다 앞선 5월 7일에는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가 거제도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격멸하는 옥포해전이 벌어지는 등 개전 초의 한달 동안 거두었던 눈부신 승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7월에 접어들어 7월 8일,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에서 우키다 히데이에의 병력 지원까지 받아 전력을 증강시킨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를 궤멸적인 타격을 입혀가며 박살내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

  또한 간신히 충청도로 우회하여 금산성을 함락시킨 뒤 전라도로 진격하는 관문 중 하나인 웅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제6군이 이치에서 권율에게 발목을 잡히며 조헌이 이끄는 충청도 의병군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등 극심한 대치상황의 연속이었다.

  특히 게릴라전으로 일관하던 곽재우 의병군이 점차 관군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현풍, 창녕, 영산 일대의 읍성들을 탈환하기까지 하자 이 일대를 지키던 일본군 수비대( 특히 낙동강의 수송로를 지키던 고령의 무계 보루가 연이은 의병진의 기습공격으로 수비가 어려워지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는 결국 성주성까지 퇴각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그야말로 엉망이 된데다 중요한 축선에 위치한 성주성이 넘어가면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및 대구 ━ 구미 ━ 김천을 잇는 일본군의 보급로가 차단당하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할 수 있었다.

  때마침 성주성을 수비하던 하시바 히데카쓰( 羽柴秀勝, 1569~1592 )의 제9군(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병력을 포함, 약 9천여명 )이 부산-거제 일대의 경비를 위해 모리 가문의 원로인 가쓰라 모토쓰나의 1만 병력과 교대를 한데다 고령 일대의 모리군 병력이 일제히 성주목으로 집결하며 성의 수비병력은 무려 2만명으로 증강되어 모리군으로서는 조선군의 공세에 대응해 어느 정도 해볼만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모리 데루모토는 유사시 성주성의 구원을 위해 가신 요시미 모토요리( 吉見元賴, 1575~1594 )와 모리 모토야스( 毛利元康, 1560~1601 )로 하여금 상시 병력을 준비시켜 요격준비를 갖추도록 지시해두고 있었다.

  1592년 7월의 대대적인 승전을 토대로 조선 관군과 의병진은 경상도 일대의 주요 읍성을 탈환해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였고 성주성 역시 그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의병장 정인홍과 김면은 그 간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로 자신감을 얻어 전라도 지역에서 거병한 최경희와 임계영의 의병군 및 운봉과 구례 일대의 관군 5,000여명을 증원받는 등 무려 2만명에 가까운 대군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만한 병력이라면 충분히 성주성 탈환을 노려볼만하다 여긴 조선 관군과 의병 연합군은 1592년 8월 21일, 본진인 고령을 출발해 합천을 거쳐 성주읍내로 진입, 성주성 남문과 동문 일대에 병력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모리 가문의 유기적인 합동작전, 제1차 성주성 전투

  8월 21일, 성주성 남문에 올라 성밖에 대규모 조선군이 집결하는 것을 확인한 가쓰라 모토쓰나는 즉시 기존 작전대로 개령면의 본진으로 증원부대를 요청하는 전령을 급파하는 한편 주력부대를 남문과 동문 일대에 집결시켜 방어준비에 착수했다.

  비록 전국시대 기간 중 일본의 성과는 구조가 확연하게 다른 성주성이지만 일단 2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주둔한데다 이들은 내전을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전투를 벌인 바 있는 강병들이었다. 물론 성주성 전투 이전 무계 보루를 기습당해 스타일을 구긴 바 있지만 게릴라전과 정규전은 분명 차원이 다른 싸움임에 분명했다.

  한편 성밖에 포진한 정인홍, 김면 의병진은 지형적으로 험준한 서문과 북문보다는 평지에 위치해 공성장비의 접근이 용이한 남문과 동문에 공세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8월 22일, 보병들이 성을 서서히 포위하기 위해 전개하는 동안 운제와 충차 등의 공성장비가 제작되는 등 성을 공격할 준비가 갖춰지던 찰나 조선군의 배후에서 요시미 모토요리와 모리 모토야스가 지휘하는 증원부대가 진격해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동안 게릴라전을 통해 실전경험을 쌓았다고 하지만 이런 대규모 정규전, 그것도 예상치 못한 기습공격을 받은 조선군으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이 당연했다.

  애써 준비한 공성장비까지 내버려둔 채 조선군이 퇴각하면서 제1차 성주성 전투는 모리 가문의 승리로 끝이 나버렸다.
  전국시대 이래 성을 굳건하게 지키며 증원부대로 적의 배후를 타격하는 패턴의 전투를 많이 겪은 모리 가문의 전략 앞에 조선군의 모처럼만의 반격이 어처구니없이 실패한 셈이었다.

 

  지휘체계의 문란, 제2차 성주성 전투

  제1차 전투에서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기습공격을 당해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 신세처럼 도주한데 격분한 정인홍과 김면은 설욕전을 준비했지만 이번에는 그 절차가 문제였다.

  성주성을 탈환하겠다는 목표에 집착한 나머지 지휘체계를 무시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인데 바로 경상우도 감사인 학봉 김성일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은 채 무단으로 합천군수인 배설( 명량에서 김원해가 연기한 그 "배설"이 맞다 )과 합천 가장 김준민을 설득하여 성주성 공격을 재개한 것!

  이런 중요한 작전은 당연히 직책상 윗사람에게 보고하여 협업을 해야하는 것이 당연한 오늘날의 시각으로 봤을 때 그야말로 큰 실수를 한 셈이라 할 것이다.

  당연히 자신들의 상관은 전혀 모르는 작전에 동원된 배설이나 김준민은 둘째치더라도 의병장 김면이 여기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는데 바로 합천군수 배설에게 명령을 행사한 것!

  제1차 전투 당시 모리 가문의 지원부대에게 뒷통수를 얻어맞은 바 있던 전훈을 반영해 개령에서 성주읍내로 넘어오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부성현에 복병을 배치하여 방어할 장수로 합천군수 배설을 지명한 것이 문제였다.

  배설의 입장에서는 일개 백면서생인데다 의병장인 김면의 명령을 받는다는 것이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었고 실제 사료에도 "내가 어찌 서생의 명을 따라야하는가?"라며 어처구니없어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의 읍성과 일본의 성곽은 기본적으로 평화기와 오랜 내전을 겪은 환경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비록 화포 공격에 대비해 낮고 두꺼우면서 잡석과 토사를 이용해 포탄 직격 시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구조를 채택했지만 1592년의 일본군은 철포를 보유하고는 있어도 전형적으로 높고 견고한 성곽을 공격하며 실전경험을 쌓은 이들이었다. 성주성 함락 이후 가쓰라 모토쓰나군은 일단 별도로 토루와 담을 두른 일본식 성곽을 증축하지 않고 기존의 조선 성곽을 활용하는 대신 평양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처럼 별도로 담이나 망루를 더 추가하는 보강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사진:유진우 기자)
조선의 읍성과 일본의 성곽은 기본적으로 평화기와 오랜 내전을 겪은 환경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비록 화포 공격에 대비해 낮고 두꺼우면서 잡석과 토사를 이용해 포탄 직격 시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구조를 채택했지만 1592년의 일본군은 철포를 보유하고는 있어도 전형적으로 높고 견고한 성곽을 공격하며 실전경험을 쌓은 이들이었다. 성주성 함락 이후 가쓰라 모토쓰나군은 일단 별도로 토루와 담을 두른 일본식 성곽을 증축하지 않고 기존의 조선 성곽을 활용하는 대신 평양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처럼 별도로 담이나 망루를 더 추가하는 보강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 유진우 기자)

  결국 배설은 김면의 명령을 과감하게 무시한 채 자신의 병력과 함께 그대로 전장을 이탈해버렸지만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정인홍과 김면은 9월 10일, 하루동안 남문과 동문을 맹공했지만 사상자만 발생하며 격퇴당하자 11일 아침부터 공성장비를 전개시켜 총공세에 돌입할 준비를 갖췄다.

  이 때 다시금 모리 가문의 증원부대가 의병진을 휩쓸기 시작했고 때마침 가쓰라 모토쓰나도 출성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대규모 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애초 대규모 회전에서 모리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의병진은 이번에도 속절없이 무너져내렸고 그 와중에 김면의 별장인 손승의가 철포에 맞아 전사하는 등 혹심한 인명피해까지 입으며 퇴각하는 망신을 당해야 했다.

  제2차 성주성 전투는 보고 체계 무시와 그 반사적으로 발생한 명령불복종까지 겹치며 관군과 의병의 내홍까지 확인하는 처참한 패전이 아닐 수 없었다.

 

  화포가 필요해! 제3차 성주성 전투

  이처럼 무려 2차례나 성의 탈환에 실패하자 정인홍과 김면은 전략을 전격적으로 다시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지휘체계의 확립이 필요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제3차 전투가 벌어지던 1592년 12월 경에 이르면 김면은 경상도 일대의 의병을 총지휘하는 의병도대장, 정인홍은 경상의병장으로 승진함으로써 지난 번과 같은 항명사태가 벌어질 경우 이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593년 1월에는 아예 종2품인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김면이 제수되는데 그는 성주성 전투 이후 개령의 모리 본진을 공격할 때에도 명령불복종을 반복한 배설에게 곤장형을 내려 제2차 전투 참패의 분풀이를 톡톡히 하게 된다.

  제3차 전투가 벌어지는 12월 경이 되면 여러모로 상황이 정인홍과 김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데 우선 평양성 전투가 격화되며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피해가 급증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그 동안 성주성 구원 출진을 하던 요시미 모토요리와 모리 모토야스가 휘하 부대와 함께 북상함으로써 성주성이 본진의 지원을 전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가쓰라 모토쓰나로서는 이제 성주성에 주둔한 병력만으로 어떻게든 조선군의 공격을 막아내야하는 처지에 놓였지만 오랜 실전경험으로 단련된 그였기에 죽음을 각오한 수성전 준비에 착수했다.

  하지만 가쓰라 모토쓰나를 더욱 난감하게 만든 것은 이제 권한이 대폭 강화된 김면의 요청에 따라 최경희, 임계영 의병군이 다시금 고령으로 넘어와 개령의 본진과 성주성의 연결을 철저하게 교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성주성이 위기에 빠지더라도 개령의 모리 데루모토로서는 이미 주력부대의 일부까지 북쪽으로 보낸 상황에서 한줌뿐인 지원군마저 투입할 루트가 차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모든 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데다 때마침 혹독한 추위가 닥치며 주로 규슈의 따스한 지역에서 파병된 모리군으로서는 전쟁 첫해가 그렇게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함경도로 진출한 가토 기요마사의 병력은 8,864명의 전사자 중 상당수가 동사자였을 정도로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

  1592년 12월 7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김면-정인홍 의병군은 마침내 최후의 총공세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꼭 성공하리라 여겨졌지만 12월의 혹심한 추위는 조선군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는데다 2만명에 달하는 모리군의 치열한 방어가 다시금 빛을 발하며 무려 8일이나 공성전을 벌였지만 끝내 성을 탈환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평양성 전투 당시 조·명 연합군이 각종 화포를 동원했음에도 적지않은 사상자를 기록하며 간신히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몰아낸 것을 감안한다면 제대로 된 중화기 지원없이 운제와 비루를 동원해 철포로 무장한 모리군을 공격한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결국 12월 14일까지 이뤄진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인명피해만 누적되자 의병진은 결국 포위를 풀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조건을 다 갖췄음에도 공성에 필요한 화포 등의 중화기 부재가 낳은 쓰라린 패전이었다.

  과연 성주성 전투가 승리였을까?

  이후에도 굳게 성을 지킨 가쓰라 모토쓰나의 모리군이었지만 1593년이 되자 상황은 일본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이에 따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효율적인 작전을 위해 이례적으로 전군에 철군령을 내려 전선을 경상도 해안가 일대로 축소시키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물론 한양에 주둔한 병력까지 모두 철군한 이후에는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진주성을 총공격( 아시다시피 진주성은 꾸준히 방어준비를 하여 다량의 총통과 비격진천뢰 등 중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여 2만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며 간신히 성을 함락시켰지만 결국 전라도 진출에 실패했고 일본군은 남은 병력을 총동원해 경상도 해안가 일대에 일본식 성을 쌓아 농성전에 돌입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주성에 2만에 달하는 병력을 계속 주둔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점차 전선이 축소되는 마당에 굳이 끝까지 사수할 필요가 없어지자 1월 15일, 마침내 가쓰라 모토쓰나는 성문을 열고 개령의 본진으로 철군함으로써 성주성은 조선군의 수중에 들어온다.

  문제는 김면, 정인홍에 관련된 각종 기록에서 이를 두고 승리라고 과대포장하는 글들이 온라인이나 각종 서적을 통해 유포되고 있는데 성주성 전투는 엄연히 일본군이 전략적 결정에 따라 스스로 포기하고 물러났음으로 우리 측의 패전이라는 점이다.

  비록 최종적인 결과는 승리라 해도 의미가 크게 과장되지는 않지만 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도 충분한 화력을 갖추지 못한 채 병력을 돌진시켰다가 막대한 인명피해를 낸 제3차 전투만 봐도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현재 복원 중인 북쪽 성곽과 성주여자중·고등학교 교문 앞 4거리의 서문터 표지석, 쌍충사적비성주군의 의욕적인 추진력과 동신건설의 오랜 노하우가 결합된 성주성 복원사업은 앞으로도 순항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사진:유진우 기자)
현재 복원 중인 북쪽 성곽과 성주여자중·고등학교 교문 앞 4거리의 서문터 표지석, 쌍충사적비성주군의 의욕적인 추진력과 동신건설의 오랜 노하우가 결합된 성주성 복원사업은 앞으로도 순항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사진:유진우 기자)

  성주성 관람 포인트

  현재 성주성의 흔적은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북문 일대가 아무래도 가장 선명하지만 경산리의 성주여자중·고등학교 교문 앞 대로에 서문지 표지석과 쌍충사적비가 남아있고 군청 옆의 성산관 역시 복원되어 있는 상태다.

  서문지와 서쪽 성벽이 있던 자리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지만 동선이 잘 남아있어 당시의 모습을 추정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한번 들러보시기를 권한다.

  아울러 최근 사드 포대 배치 등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시기에 이처럼 성주성의 복원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성주군과 사전 통보없이 현장을 찾은 필자에게 취재를 허가해준 동신건설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디펜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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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호 2022-10-11 21:43:04
이 기사에서 합천군수 배설은 잘못된 정보입니다.
이 때 배설은 성주 가장이었습니다.
당시 성주목사 이덕열의 양호당 일기를 보면 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소설임을 확인 가능합니다.
문의를 하시려면 sowoo6500hanmail.net으로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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