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터 전차 (2) - 계획의 전면 수정
상태바
판터 전차 (2) - 계획의 전면 수정
  • 이치헌 기자
  • 승인 2020.06.11 00: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소전 발발, 계획의 전면 수정

  전차 제작사 3사가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며 VK20.01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1941년 6월 22일, 작전명 “바르바로사”( 오페라치온 “바르바로사”, Operation "Barbarossa" )가 발동되며 독일군이 국경을 넘어 소련을 전면 침공했다.

  미처 전쟁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소련군은 풍비박산났고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가 함락되었을 때는 스탈린의 아들인 “야코프”가 포로로 잡힐 정도였다.

  독일군은 쾌속의 진격을 거듭했고 1941년 12월에는 모스크바 문턱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진격의 와중에 독일군은 소련군의 신형 전차인 T-34( 정확하게는 76.2mm 전차포를 탑재한 T-34/76 )와 조우하며 경이적인 방어력과 기동력, 화력에 경악했다.

  T-34/76은 당시 독일군이 꿈꾸던 전차의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었는데 포탑이 좁고 소음이 심하며( 디젤엔진을 탑재한 이상 어쩔 수 없이 전차병들이 감내해야할 부분이지만 ) 대부분의 차량에 무전기가 설치되지 않아 전차소대장이나 중대장이 효과적인 지휘를 하기가 어려우며 장전수가 없다보니 전차장이 장전수 역할까지 맡다 보니 전차를 지휘해야 하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단점을 빼면 나머지는 그대로 장점이 된 셈이다.

  첫째로 방어력을 보자면 경사각을 적용한 장갑 덕분에 차체의 용적은 좁아지게 되었지만 대신 두께에 비해 보다 높은 장갑 방어력을 가지게 되어 독일군이 보유하고 있던 37mm 대전차포로 격파할 수 없게 되었다.

(사진 : 디펜스 투데이)
추운 소련에서의 전차운용 (사진 : 디펜스 투데이)

때문에 독일군은 T-34와 조우해 전투를 치를 시 최악의 경우 88mm 중대공포를 견인해올 정도였다.

  두 번째는 직경이 큰 대형 보기륜을 장착하고 폭이 넓은 무한궤도를 두름으로써 임야 및 비포장 도로에서의 기동성을 증가시킴은 물론 접지압을 감소시키는 효과까지 거두었다.

  세 번째는 장포신 76.2mm 전차포를 탑재해 당시 독일군이 보유한 그 어떤 전차도 일격에 격파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바로 소련이 자랑하는 우수한 V2 디젤엔진으로 500마력에 달하는 출력 덕분에 T-34/76을 최대 시속 55km라는 쾌속의 기동력으로 질주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함은 물론 경유를 사용하는 덕분에 화염병 공격에도 능히 대처할 수 있었다.

  이러한 T-34/76과 조우했으니 독일군으로서는 이 전차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전차가 필요했다.

  게다가 T-34/76은 대단히 단순한 외형과 구조로 인해 생산성이 우수했고 후퇴하는 와중에 공장이 불타고 중장비와 부속품들이 분해되어 동쪽으로 이동되는 터라 생산이 지지부진했지만 조만간 이들 공장이 재가동될 경우 2억에 달하는 소련의 인적자원과 더불어 독일군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판터전차의 개발

  독일 육군 병기국으로서는 이 전차에 맞서기 위한 차기 주력전차가 이제 20톤급 궤도 차량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 자명해진 마당에 더 이상 이 계획에 매달릴 필요성이 없어 결국 VK20.01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기에 이른다.

  대신 30톤급 궤도 차량인 VK30.01을 입안했다.

  이에 따라 요구사항은 보다 구체화되었고 다이믈러 벤츠와 만( MAN )사가 참여했다.

  당시 요구사항을 보면 어떤 의미에서 T-34/76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① 전고 2.99m, 전폭 3.15m, 지상고( 지면으로부터 차체 저판까지의 높이 ) 50cm를 준수할 것
  ② 출력 650~700마력의 엔진을 탑재할 것
  ③ 전면 장갑 두께 35°경사 60mm, 측면 장갑 두께 50°경사 40mm, 차체 상부 장갑 두께 16mm
  ④ 최대 속도 시속 55km
  ⑤ 최소 5시간의 작전 수행이 가능할 것

  하지만 막상 다이믈러 벤츠와 만사가 요구사항에 근거해 차체를 설계해보니 중량을 도저히 30톤으로 준수하기가 어려워져 난색을 표함에 따라 육군 병기국은 1941년 12월 9일 회의를 통해 중량을 36톤으로 상향 조정했다.

  이와 함께 공병들이 운용하는 전차 통과용 교량이 견딜 수 있는 최대 하중이 16톤에 불과했으므로 도하용 장비의 도입을 요구사항에 추가했다.

  이렇게 최종적인 요구사항들이 확정되자 다이믈러 벤츠와 만( MAN )은 각각 VK30.01(D)와 VK30.02(M)의 개발명으로 시제 차량을 제작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대조가 나왔는데 우선 다이믈러 벤츠사의 시제 차량은 사실상 T-34/76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 정도로 유사한 외형을 갖춘 반면 만( MAN )사는 경사장갑과 전방 스프로켓, 토션바식 현가장치를 적용함과 동시에 포탑을 차체 중앙에 근접해 설치함으로써 비교적 넓은 포탑 내부 공간과 전차병의 거주성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독일전차의 외형을 고수했다.

  이처럼 기본적인 뼈대가 나오자 다이믈러 벤츠사는 우선 1942년 6월까지 5대의 시제차량을 제작하기로 결정, 이 중 1대는 MB507 디젤엔진을, 1대는 MB503 엔진을 탑재하고 3대는 마이바흐사의 HL210을 장비하기로 결정했다.

  반면 만( MAN )사는 가솔린 엔진을 탑재하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신형 엔진 개발 및 장착에 대한 구체적인 안건이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당시 만( MAN )사의 신형 디젤엔진 개발이 실패하고 다른 독일의 업체들 역시 디젤엔진의 개발에 실패한 것이 원인이었는데 결국 독일은 종전 시까지 우수한 고출력 디젤엔진의 개발에 실패하고 말았다.

  여하튼 만( MAN )사는 예정대로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시제차량의 제작에 돌입했고 마침내 1942년 3월 6일, 양 사의 시제 차량과 모형을 유심히 비교하며 분석한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다이믈러 벤츠사의 VK30.01(D)를 호의적으로 평가해 약 200대를 발주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육군 병기국의 입장에서는 포탑이 차체 전방으로 너무 치우쳐진데다 아직 기술적으로 완성이 되지도 않은 디젤엔진을 탑재한 Vk30.01(D)보다는 비교적 여유있는 설계와 더불어 토션바식 현가장치를 채택함으로써 덩치가 큰 차체 내부에서의 활동성을 보장하는 한편으로 넓은 포탑링 덕분에 장갑의 강화 및 대구경 전차포의 탑재 등 개량에도 유리한 만( MAN )사의 VK30.02(M)을 지지하며 좀더 검토해볼 것을 건의했다.

  아무리 고집이 센 히틀러 총통이라고 할 지라도 일단 타당성이 있었기에 결정을 철회했고 히틀러 총통과 제국 군수상인 알베르트 슈페어, 육군 병기국이 검토해 내린 요구사항은 늦어도 1942년 12월부터는 대량 생산에 돌입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에서 VK30.01(D)와 VK30.02(M)의 운명이 갈렸는데 우선 VK30.01(D)는 소형 포탑을 채용함으로써 원거리에서 적의 포탄에 피격될 확률을 최소화시키고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이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포탑 내부 공간이 비좁아져 전차병들의 거주성과 활동에 제약을 주고 포탑링이 작아짐에 따라 차후에 대구경 전차포를 탑재하거나 장갑 두께를 강화하기가 곤란했다.

  이 때문에 보다 여유가 있는 만(MAN)사의 포탑을 탑재할 것이 검토되었지만 이미 차체의 포탑링이 너무 좁아 호환이 되지 않았으므로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스프링식 현가장치를 채용한 VK30.01(D)보다는 토션바식 현가장치를 복수로 장착한 VK30.02(M)이 안정성과 기동성에서 보다 유리했다.

  여기에 Vk30.01(D)는 하천 도하에 있어 수중냉각이 불가능한 반면 VK30.02(M)은 라디에이터에 물이 스며들도록 함으로써 수냉식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덕분에 VK30.01(D)는 수중 주행시간이 10분 남짓했던 반면 VK30.02(M)은 제한이 없었다.

  그렇지만 딱히 결정적인 차이점은 없었기에 1942년 5월 13일, 독일 육군 병기국은 다이믈러 벤츠와 만( MAN ) 양 사의 시제차량 모두 장갑 방어력이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한편으로 조속히 생산에 돌입해야함을 강조하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5월 14일, 차기 전차로 만( MAN )사의 VK30.02(M)이 채택됨으로써 다이믈러 벤츠는 탈락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VK30.02(M)은 Ⅴ호 전차 “판터”( Panzekampfwagen Ⅴ "Panther" sd.kfz 171 )로 채용되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판터 전차 측면 (사진: 디펜스 투데이)

Ⅴ호 전차의 채용안이 확정되자 이제 만( MAN )사의 간부들은 이 차량을 12월부터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다이믈러 벤츠, 헨쉘, MNH 등의 방산업체들과 회의를 개최해 본격적으로 생산에 착수하기로 했다.

  우선 만( MAN )사가 Ⅴ호 전차의 양산형 시제차량을 1942년 9월까지 완성하면 이듬해 4월까지 만( MAN )사가 84대, 다이믈러 벤츠에서 91대, 헨쉘사가 66대, MNH사가 71대를 생산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 만( MAN )사는 예정대로 1942년 9월에 양산형 시제차량을 뉘른베르크 공장에서 완성시켰고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되는듯 했지만 “티거” 전차가 그러했듯 이 차량 역시 아직 제대로 된 포탑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 포탑과 동일한 하중을 상정해 목업( Mock Up )을 제작해 장착하여 주행 시험을 실시했다.

  하지만 10월에 마침내 포탑이 완성됨에 따라 시제 2호 차량부터 정식으로 주행 시험을 실시할 수 있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두 차량은 모두 도하장비를 장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11월에 이르면 아이제나하에서 공개 시범행사가 개최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제국 군수상 알베르트 슈페어는 판터의 시제 차량에 탑승해 1시간 이상 주행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여하튼 판터 전차의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선 차체는 Ⅲ호 전차 이래 전형적인 독일전차의 스타일을 고수했는데 우선 차체의 좌측 전면에 조종수석이, 우측에는 무전수 겸 전방 기관총 사수석이 배치되었고 차체 중앙에 설치된 포탑에는 전차장, 포수, 장전수가 탑승해 효과적인 임무 배분 및 전투가 가능했다.

 

경사장갑의 도입

  특히 넓은 포탑 내부 공간은 자연 다수의 포탄을 탑재한 상태에서도 전차병들의 활동을 보장해주었고 이것이 T-34/76과의 교전에서 대체적으로 판터가 우위를 점하는 요소 중 하나로 작용했다.

  판터 전차가 이전의 독일전차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역시 T-34/76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경사장갑을 도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판터 전차 정면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포탑 측면 (사진: 디펜스 투데이)

경사각도는 차체 전면이 35°에 두께 80mm, 차체 측면이 40°에 두께 40mm, 차체 후부가 30°에 두께 40mm로 차체 전면 장갑판 두께를 90°수직 장갑판 두께로 환산할 경우 무려 140mm에 달해 “티거” 전차보다 우수한 방어력을 발휘했다.
  변속기는 ZF사의 AK7-200이 채용되었는데 이 기기는 1942년 2월부터 설계돼 8월에 시제품 2기가 완성되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파워팩 (사진: 디펜스 투데이)

AK7-200은 전진 7단, 후진 1단의 수동식으로 300RPM에서 1단이 시속 4.1km, 2단이 8,4km, 3단이 13.3km, 4단이 20.8km, 5단이 30.8km, 6단이 42.5km, 7단이 55.5km로 되어 있고 이 경우 제자리 선회에 요구되는 반경은 각각 5m, 11m, 18m, 30m, 43m, 61m, 80m였다.
  물론 이 변속기는 650마력 엔진용으로는 처음 개발된 것이었기에 문제점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예로 1943년 7월 10일, 제10 기갑여단에 배치된 판터 D형 200대 중 가동차량이 불과 10여대 남짓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보기륜을 장착하기위해 조립하는 모습(사진: 디펜스 투데이)

 또한 정비의 효율성을 위해 조종수석과 무전수석의 천장은 볼트를 풀어내면 분리될 수 있도록 조치해 변속기의 정비와 교환을 용이하게 함은 물론 기관실 중앙에는 엔진 점검용 해치를 설치함과 동시에 좌우에는 배기관을 배치했다.

  장갑판은 압연강판 재질을 채용했지만 당시 독일 국내에서 산출되지 않는 니켈이나 텅스텐의 사용은 일체 금지되었다.

  덕분에 강도가 저하될 것을 우려, 천연가스 및 산소용접을 통해 표면경화 작업을 실시해 강도를 보강했다.

  아울러 장갑판의 조립에서도 용접을 적용해 신속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했는데 용접부를 ‘ㄷ’자 형태로 가공해 서로 맞물리도록 함으로써 용접시간을 단축시키고 충분한 강도를 확보할 수 있게 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파괴된 판터전차 (사진: 디펜스 투데이)

차체 전면에는 D형의 경우 아직 전방 기관총용 원형 거치대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로 MP 40 기관단총을 발사할 수 있도록 총안이 설치되었지만 1943년 11월경부터 생산된 A형을 기점으로 원형 거치대가 설치되어 MG 34 기관총이 거치되었다.

 

판터전차의 엔진

  엔진은 마이바흐 HL210P30이 채용되었는데 이 엔진은 그 동안 보급되어온 가솔린 엔진들과 마찬가지로 수냉식 12기통에 21,350cc 배기량으로 약 650마력의 출력을 낼 수 있었다.

  이 엔진은 이후 보다 출력이 향상된 700마력의 HL230P30으로 교체되었는데 엔진의 높이가 119cm에 달해 차체의 높이가 높아지는 원인이 되었다.

  연료탱크는 총 5개소, 약 730리터를 채울 수 있었는데 이 중 130리터는 예비 연료로 규정되었다.
  이를 기준으로 운용해본 결과 시속 25km로 도로를 질주할 경우 약 260km의 항속거리가 발휘되었고 예비 연료를 사용할 경우 45km를 추가로 연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들 연료탱크의 용접이 불량해 약간의 틈새만 발생해도 공기보다 비중이 무거운 기화가스가 유출되어 기관실에 잔류함으로써 고온을 발생시키는 엔진 배기관과 접촉할 경우 곧잘 화재로 이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기술진은 연료탱크에 환기용 배기관을 설치하고 연료탱크 자체도 개량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이 문제점은 G형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해결되었지만 하필이면 첫 실전인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치명적인 결함으로 작용했다.

 

[디펜스 투데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