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34/85 전차의 서울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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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34/85 전차의 서울진입
  • 이치헌 기자
  • 승인 2019.11.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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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북한군의 T-34/85 전차들이 서울함락

국군의 반격 실패로 의정부 함락

  제7 보병사단 “칠성부대”가 동두천과 포천에서 연이어 참패하자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사단사령부를 방문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의정부를 사수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면서 “반격하라”는 현실에 동떨어진 명령을 내렸다.

  때마침 부랴부랴 온양에서 달려와 현지에 도착해 있던 제2 보병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아직 자신의 사단 주력이 도착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반격은 시기상조이며 전선을 후퇴시켜 방어에 유리한 한강에서 지연전을 전개하자는 상식적인 건의를 했지만 간단하게 묵살당했다( 요즘 세대 표현으로 “씹혔다”정도 되겠다 )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의정부를 적의 수중에 넘겨줘선 안 되오. 그리고 적의 전차는 정 안되면 육탄공격으로라도 파괴하시오.

반드시 이 곳에서 적을 막아내야 하오!”

  57mm 대전차포와 2.36인치 바주카포로도 격파가 안 된 전차를 육탄공격으로 파괴하라고 명령하는 채병덕 총참모장의 지시는 마치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 전차에 감행된 자폭 공격( 실제 이런 식으로 적잖은 수의 셔먼과 스튜어트 경전차가 격파되었다 )을 연상케 한다.

 요컨대 전차를 상대하는 보병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육탄 돌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시기 육군 수뇌부가 아직 정신 못 차렸음을 반증해주는 사례다.

  이에 따라 유재흥 준장은 26일 오전 8시를 기해 1보병연대에게 동두천을, 새롭게 배속된 임충식 중령의 제18 보병연대(현 제3 보병사단 “진,眞 백골 연대”)에게 신산리 방면을 공격하도록 했다.

  같은 시각 동두천에서 재편성을 마친 북한군 제4 보병사단은 제7 보병사단이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을 것으로 예상한 동두천-덕정-의정부를 잇는 3번 국도( 제1 보병연대의 주 진격로 ) 대신 서쪽에 위치한 봉암리~덕정 사이의 간선도로( 제18 보병연대의 주 진격로 )에 주 병력을 집중시켰다.

  6월 26일 오전 8시를 기해 의정부를 출발한 제1 보병연대는 적의 저항을 받지 않고 유유자적 동두천~소요산에 도달한 반면 10시에 출발한 제18 보병연대는 봉암리에서 T-34/85를 앞세운 제4 보병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전차가 없는 제18 보병연대는 그대로 와해되어 패주하기에 급급했고 때마침 제303 수색대대로부터 제1 보병연대의 반격을 보고받은 제4 보병사단은 곧바로 덕정을 좌우에서 협공했다.

  이에 따라 제1 보병연대는 퇴로가 완전히 차단당해 소대별로 분산 퇴각을 감행하여 각각 우이동과 창동, 태릉 방면으로 철수했다.

  동시에 오전 3시에 출발한 제2 보병사단 5 보병연대 소속 2개 대대는 축석령에서 북한군 제109 전차연대의 T-34/85들과 10여 분간 조우전을 벌였다가 박살나고 말았다.

  이미 제3 보병연대가 초토화된 상황에서 겨우 2개 대대로 반격을 감행한 한국군의 무모한 작전이 빚은 참극이었던 셈.

  제2 대대장 차갑준 소령은 하는 수 없이 태릉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제1 대대장 이정도 소령 역시 퇴계원 방면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한국군 제2, 7 보병사단의 반격작전은 참혹한 실패로 끝나고 13시를 기해 제4 보병사단이 의정부 시내로 진출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이형근 준장과 유재흥 준장은 고심 끝에 의정부를 포기하기로 결정했고 이로써 6월 26일, 의정부가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반면 당일 오전에 서울에 도착한 김병휘 중령의 제2 보병사단 25 보병연대는 의정부 남쪽의 백선천과 백석교 일대에 2대대와 3대대를 배치해 방어전에 착수했다.

  이 때 백석교 공방전 도중 교량 밑에 매복하고 있던 2.36인치 바주카포 분대장이 근접거리에서  제107 전차연대 소속 T-34/85 1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비록 후속 전차의 85mm 포 사격으로 분대장은 전사했지만 그렇게 격파되지 않던 괴물이 불타오르는 장면은 북한군 전차병들에게 적잖은 충격으로 작용해 후속 전차들이 의정부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황은 아직 호전되지 못해 북한군 제3, 4 보병사단이 T-34/85 60여대를 앞세워 공세를 재개, 27일 정오까지 창동에 구축되었던 한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제7 보병사단 “칠성부대”를 주축으로 이응준 소장의 제5 보병사단 “열쇠부대” 예하 제15/20 보병연대 및 김계원 중령의 육군 포병학교 기간병과 교육생들을 비롯,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집결시켜 미아리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이에 대해 북한 제1 군단은 강력한 포병화력으로 응수해주었다.

  76.2mm와 122mm 곡사포는 물론 82mm, 120mm 박격포탄이 우박 쏟아지듯 미아리 일대에 내리꽂히며 제107, 109 전차연대의 T-34/85 60여대가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지만 한국군의 결사항전으로 27일 밤까지는 미아리 방어선을 사수할 수 있었다.

 

북한군 T-34/85 전차들의 서울진입

  그러자 6월 28일 새벽 2시, 북한 제1 군단은 미아리 방어선에 대한 정면 공격을 포기하고 제107 전차연대의 T-34/85 2대에 제4 보병사단 18 보병연대에서 선발된 특공조를 태워 홍릉 지역으로 침투시켰다.

  과수원의 사과나무를 짓밟아버리며 돌진을 감행한 T-34/85는 곧 서울 시가지에 어렵지 않게 진입했고 북한전차가 서울 시내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한국군 부대가 동요하며 미아리 방어선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6월 28일 새벽 4시~5시를 기해 마침내 북한군 제1 군단은 미아리 방어선에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105 전차여단장 류경수 소장은 서울 입성의 영광은 당연히 자신이 지휘해야 함을 강조하며 직접 T-34/85 100호에 탑승해 선두에서 여단을 진두지휘했다.

  여단장이 직접 전차를 지휘하자 107, 109 전차연대의 전차병들은  간단하게 미아리를 돌파한 T-34/85 전차들이 서울 시내로 쇄도해 들어왔다.

  1950년 6월 28일 15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개전 3일 만에 T-34/85를 앞세운 북한 제1 군단의 수중에 떨어졌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전쟁기념관 촬영)

 

국군의 서울방어전 참패와 후퇴

제2, 7 보병사단 및 수도경비사령부와 육군사관학교 생도대까지 동원된 방어전은 참패로 끝났고 한강인도교의 폭파로 인해 간신히 퇴각해 왔던 제1, 6 보병사단은 중장비 대부분을 파기한 채 한강을 헤엄쳐 건너야 했다.

  특히 가장 혹심한 피해를 입은 제7 보병사단 “칠성부대”의 경우 한강 이남에서 실시한 점호 결과 최초 9,698명이었던 사단 병력이 겨우 1,200명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완전 궤멸이다 )

  중화기 손실은 더욱 심각해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M1919A4 기관총 4정이 전부였다.

  박격포와 대전차포는 물론 차량들까지 남김없이 한강 이북에서 손실하고 몸만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전쟁기념관 촬영)

 제105 전차여단은 서울 함락의 공으로 “서울” 칭호를 수여받았고 서울 함락 과정까지 파괴된 T-34/85의 수는 다 합쳐도 20여대가 되지 않는  경미한 수준의 피해만 입었다.

  반면 이 20여대의 T-34/85를 잡기 위해 한국군이 치른 희생은 너무나도 컸다.
 
  한국전쟁 서전에서 T-34/85는 독소전의 영광을 제7 보병사단 격파를 통해 재현했고 전차를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한국군은 마침내 6월 28일, 수도 서울을 함락당했다.

  하지만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와 제8 보병사단 “오뚜기 부대”가 포진한 동부전선에서는 전혀 의외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7월 19~20일에 걸쳐 전개된 미 제24 보병사단의 대전(大田) 방어전을 통해 3.5인치 바주카포 의 등장으로 서서히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디펜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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