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거 1 전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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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거 1 전차 (1)
  • 이치헌 기자
  • 승인 2019.12.1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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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만든 제 2 차세계대전 최강의 전차 티거

20세기의 베스트 전차(Tank) - 제2차세계대전 최강의 전차 티거

(사진: 디펜스 투데이)
1944년 08월 12일에 촬영된 국방군 제503 독립 중전차대대 소속 ‘티거’ 213호 차량 (사진: 독일 연방정부)

  1944년 08월 12일에 촬영된 국방군 제503 독립 중전차대대 소속 ‘티거’ 213호 차량

  티거는 외형적으로 경사장갑이 아닌 수직 장갑판을 채용한 전형적인 독일 전차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강력한 장갑 방어력과 공격력으로 대전 기간 중 연합군과 소련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40톤급의 VK3601(H )(사진: 독일 연방정부)

 

헨쉘사가 VK3001( H )의 개발 중단 이후 새롭게 설계한 40톤급의 VK3601(H )

  보시다시피 두터운 수직 장갑판과 상부 지지륜이 폐지되는 대신 대형 보기륜 8개를 채용하는 등 후의 티거의 외형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시기 헨쉘사는 제대로된 포탑을 완성하지 못해 차체에 실제 장착될 포탑의 중량을 가산해 콘크리트제 링을 얹어야 했다.

티거의 시작은 중전차가 아닌 요새화된 진지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돌파 전차였다.

  1937년 01월, 독일 육군 병기국의 요구에 따라 헨쉘사가 설계한 30톤급 돌파 전차인 DW1은 주력전차였던 Ⅲ호 전차보다 두꺼운 50mm 장갑과 보병 지원에 적합한 75mm kwk 37 L/24 주포를 탑재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전차들의 천국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차량들이 생산되어 전장에서 활약했다.

  소련은 베스트 셀러 T-34를, 영국은 함정과 항공기 생산에도 모자라는 생산라인을 전차에도 할당해 각종 순항전차와 보병전차를 생산해냈고 미국 역시 M3 그랜트와 리, M3/M5 경전차, M4 셔먼, M10 울버린, M18 헬캣, M36 잭슨, 그리고 궁극의 중전차인 M26 퍼싱에 이르기까지 이들 국가들의 전차를 전부 합친다면 수십 만 단위로 집계되니 그야말로 얼마나 많은 전차들이 전장에 등장해 굴러다녔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전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모델러들이나 제2차 세계대전사에 대해 그다지 깊은 조예가 없는 이들에게 전차에 대해 물어보면 어지간한 경우 “독일 전차( Panzer )” 그 중에서도 “타이거”라는 답변을 주로 듣게 된다.

  도대체 패전국의 전차가 어떻게 이런 반응이 나올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게 된 것일까?

(사진: 디펜스 투데이)
30톤급의 VK3001( H ) (사진: 독일 연방정부)
(사진: 디펜스 투데이)
30톤급의 VK3001( H ) (사진: 독일 연방정부)

헨쉘사가 DW2의 실패 이후 DW2를 보다 개량한 30톤급의 VK3001( H )


  포탑이 완성되지 않아 콘크리트제 링을 무게추로 활용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헨쉘의 경쟁사인 포르쉐의 VK3001( P )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 특유의 천재성이 발휘되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시대를 앞서간 발상으로 인해 이 시제 차량의 개발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것은 비록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승전국을 철저할 정도로 괴롭히며 막대한 피해를 강요한 독일 전차대의 활약상 때문이다.

  특히 “타이거 전차다!”는 무전을 수신할 경우 전차병들을 당황하거나 공포에 전율하게 만든 제6호 전차, 티거( Panzerkampfwagen Ⅵ "Tiger" Ausf. E sd.kfz 181 )가 그런 경우였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독일 연방정부)

 

호랑이 전차의 험난한 산고, ‘티거’의 탄생 

오늘날 제2차 세계대전 독일 전차대의 상징 중 하나로 꼽히는( 물론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도 계실테지만 ) “티거”는 당시 견고하게 요새화된 적의 진지를 분쇄해 후속부대가 돌입할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돌파 전차( Durchbruchwagen )로 개발될 예정이었다.

  티거의 개발이 시작된 동기는 1937년 독일 육군의 신형 30톤급 돌파 전차 개발을 요구한 것이 시초로 개발에는 다이믈러 벤츠, 헨쉘, 만 등 독일의 쟁쟁한 메이커들이 참여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그러나 독일 육군은 경합에서 선정된 메이커에게 30톤급 돌파 차량의 시제 차량을 1939년까지 완성해야 한다는 다소 빡빡한 마감 시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메이커들은 돌파 전차 개발안을 선정시키기 위해 개발진을 다독이며 설계와 검토를 진행시켜 나갔고 그 결과 헨쉘사의 설계안이 좋은 평가를 받아 1937년 1월, 독일 육군 병기국은 DW( Durchbruchwagen )1의 개발을 헨쉘사에 지시했다.

 티거가 전장에 데뷔하면서 보여준 능력은 순식간에 연합군과 소련군에게 공포로 작용했다.

 특히 연합군 병사들은 Ⅳ호 전차 H/J형을 티거로 오인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 전차와 티거의 실루엣이 원거리에서 관측 시 얼핏 유사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독일 연방정부)

물론 티거는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전차였고 애시당초 돌파구를 마련하거나 전선을 돌파한 적을 격퇴시키는 태스크 포스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판터와 더불어 Ⅳ호 전차들도 대전 말기까지 개량되며 운용되었다.

  DW1은 초기 보병 지원에 적합한 75mm kwk 37 L/24포를 탑재했고 이후 헨쉘사는 게라트 725로 불리는 75mm 포를 채용할 예정이었지만 포탄에 쓰일 텅스텐의 부족으로 인해 결국 크루프의 88mm kwk 36 L/56을 선택하게 된다.

  DW1은 외형상으로 보자면 Ⅳ호 전차와 유사한 포탑에 75mm kwk 37 L/24 포를 탑재하는 대신 차체 자체는 돌파 전차라는 임무에 걸맞게 각부 전체 장갑 두께를 50mm로 강화하는 한편 원칙에 충실한 독일인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해 중량까지 군에서 요구한 30톤을 정확하게 준수했다.

  기동력에 있어서는 280 마력의 마이바흐 HL 120을 채용해 시속 35km를 발휘했지만 돌파 전차라는 임무의 특성도 있거니와 어지간히 강화된 적의 대전차포 등의 변수로 인해 후속으로 전면 장갑을 60mm로 강화하고 7.92mm MG 34 마운트를 신설한 DW2가 등장했다.

  DW2는 DW1보다 중량이 3톤 증가한데다 엔진 역시 마이바흐 HL 120을 그대로 탑재했지만 다행히 최고 속도는 시속 35km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 육군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두 차량의 성능은 썩 만족스러운 편이 아니었고 자연스레 두 시제 차량의 개발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에 헨쉘사는 1938년 09월 09일부터 DW2를 보다 개량한 32톤급 VK3001( H )의 개발을 시작했으나 아직 제대로 된 포탑이 완성되지 않아 시제 차량은 어쩔 수 없이 실제 포탑과 유사한 중량에 이르는 수만큼의 콘크리트제 링들을 얹어야 했다.

  그러나 독일 전차의 특징인 수직 장갑판을 채용하는 등 훗날 티거의 기본적인 골격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차량이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마지막으로 개발한 VK4501( H ) (사진: 독일 연방정부)

헨쉘이 VK3601( H )마저 개발 중단된 이후 마지막으로 개발한 VK4501( H )

  이 차량이 보다 개량되어 Ⅵ호 전차 E. “티거”로 제식 채용된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야심차게 개발한 VK4501( P ) (사진: 독일 연방정부)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야심차게 개발한 VK4501( P )

  하지만 엔진으로 발전기를 회전시켜 모터를 구동, 주행한다는 방식으로 인해 엔진실의 용적이 지나치게 확장된 결과 포탑이 차체 전방으로 쏠려버리게 되었고 결국 헨쉘에게 패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이미 완성된 90대분의 차체는 88mm kwk 43 L/71포를 탑재해 페르디난트로 개수되어 쿠르스크전에 투입되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포탑을 장착중인 티거 (사진: 독일 연방정부)

 

헨쉘사 공장에서 생산 

티거는 거대한 시설과 근로자들의 불철주야 작업에도 불구하고 대량 생산이 어려운 단점이 있었지만 일단 전장에 투입되면 숙련된 전차병들의 기량과 더불어 독일군의 적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다.

  헨쉘이 개발에 착수할 무렵 경쟁사인 포르쉐 역시 VK3001( P )를 개발했지만 이 차량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 개발이 중단되고 말았다.

  VK.3601( H )에 이르러 서서히 티거 전차의 특징이 하나 둘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

  곧 소련 역시 독일을 모방해 85mm KS-12 대공포를 전차포로 개량해 T-34에 장착하니 바로 T-34/85가 되겠다.

  포르쉐사의 안이 실패했으니 자연 헨쉘로서는 자신들의 시제 차량이 채용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VK3001( H )의 시제 차량은 1941년 03월과 10월에 각각 2대씩, 총 4대가 제작되는 것으로 끝이 나버렸고 1942년에 사실상 개발이 중단되고 말았다.

  대신 1942년 초, 헨쉘사는 약 40톤급의 신형 시제 차량인 VK3601( H )의 개발에 돌입, 총 5대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VK3601( H )는 중량이 증가한 만큼 차체 크기도 확장되어 기존의 VK3001( H )가 전장 5.81m, 전폭 3.16m, 전고 1.85m인데 반해 VK3601( H )는 전장 6.05m, 전폭 3.14m, 전고 2.7m에 달했다.

  여기에 대응해 상부 지지륜은 폐지되었고 보기륜 역시 VK3001( H )의 7개에서 8개로 늘어남과 동시에 대형화되었다.

  그렇지만 VK3001에서 쓴맛을 본 포르쉐 역시 이러한 헨쉘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1941년 02월, 크루프사와 주포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훈련 중인 티거 중기형들로 무장 친위대 제101 독립 중전차대대 3중대 소속 차량들이다.

  티거는 단순히 전차 자체로서의 능력 외에도 혹독한 실전을 통해 단련된 우수한 전차병들의 기량이 더해져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초기 티거 전차는 650 마력의 마이바흐 HL210P45 엔진( 중앙 )을 탑재했지만 출력 부족으로 700마력의 HL230P45( 우측 )로 교체되었다. 

강철의 사신들,흑색 전투복을 착용한 무장 친위대 티거 전차병들이 자신들의 애마와 함께 단체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 독일 연방정부)

당시 크루프사는 대표적인 베스트 셀러 대공포인 88mm Flak 18을 전차 탑재용으로 개량한 시제품을 보유한 상태였고 마땅한 무장 체계가 없던 포르쉐사에게 있어 크루프사와의 계약 체결은 날개를 단 격이나 다름없었던 것.


  그렇지만 당장 주포가 생겼다고 차체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는 일

  포르쉐사가 차체의 설계에 전념할 무렵 헨쉘사는 VK3601( H )에 탑재될 무장으로 게라트 725로 불린 75mm 포, 88mm kwk 36 L/56, 105mm L/20 혹은 105mm L/28 포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훗날 포르쉐사에서 채택한 88mm kwk 36 L/56이 채택되었다.

  이것은 어디까지 후의 일이고 당시 헨쉘사는 게라트 725에 주목했지만 문제는 이 포의 포탄에 쓰일 텅스텐강 보유량이 극히 적은 관계로 병기국의 명령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헨쉘사로서는 애써 독자 개발을 추진했다가 졸지에 개발비만 날리고 물먹은 셈이었지만 당장 이렇다 할 대안이 없었다.

  유일하게 대안이라 할 것이라고는 라이벌 포르쉐사와 계약을 체결한 크루프의 88mm kwk 36 L/56이었지만 설사 이 포를 탑재한 포탑을 VK3601( H )에 그대로 장착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육군 병기국의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서둘러 신형 돌파 전차의 투입이 시급했기에 사실상 완성도가 높은 크루프의 88mm kwk 36 L/56을 예의주시했고 기존의 시제 차량들로는 이 포를 탑재하기가 어렵다는 판단 하에 새롭게 45톤급의 VK4501의 개발을 지시했다.

  이로써 간신히 개발해 놓은 VK3601( H )는 1942년을 기해 중단되고( 전차 1대 개발하기 위해 참으로 시행착오를 반복한 셈이다 ) 헨쉘은 다시금 VK4501( H )의 설계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과거와 같은 어려움을 최소화할 수 있었는데 이는 VK3001( H )부터 축적되어온 각종 노하우를 VK4501( H )에 반영했다.

  우선 VK4501( H )는 VK3601( H )에 비해 차체의 폭을 더욱 넓혔는데 이는 88mm kwk 36 L/56을 탑재한 포탑의 포탑링이 상당히 클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또한 차체 측면 장갑판 역시 두께를 80mm로 강화했다.

(사진 : 디펜스 투데이)
(사진 :독일 연방정부)
(사진: 디펜스 투데이)
1942년 12월 20일, 튀니지의 레조 디 칼라브리아 항으로 입항해 전선으로 향하는 제501 중전차대대의 티거 극초기형 112호 차량 (사진: 독일 연방정부)

제501 중전차대대는 1942년 05월에 창설된 신편 부대로 워낙 다급하게 돌아가는 북아프리카 전선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투입되는 터라 차량을 완전히 수령하지 못해 2개 중대에 Ⅲ호 전차 N형과 혼성 편제되어 있었지만 이 차량들은 미군 기갑부대를 상대로 진가를 발휘했다.

  북아프리카에 투입된 제501 중전차대대와 추가로 투입된 제504 중전차대대는 1943년 05월 17일까지 총 150대에 달하는 연합군 전차를 격파한 반면 제501 중전차대대의 손실은 베자 지구에서 공병들이 자폭시킨 7대를 포함해 겨우 10대에 불과했으니 연합군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살아남은 7대는 제504 중전차대대에 배속되어 최후까지 연합군 전차들을 향해 88mm 포탄을 퍼부었다.

  헨쉘사가 그 동안의 노하우를 활용해 나름대로 시행착오를 줄여가며 설계와 테스트에 임하는 동안 포르쉐사는 VK3001( P )에서 고배를 마셔야  헨쉘사가 그 동안의 노하우를 활용해 나름대로 시행착 했던 방식( 엔진으로 발전기를 가동시켜 모터를 구동시켜 주행하는 특이한 )을 또 고수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방식으로 인해 엔진룸의 용적이 너무 커져 포르쉐사의 VK4501( P )는 포탑이 지나치게 전방으로 치우치는 형상을 갖추게 되었다.

 

헨쉘사의 시제차량으로 선정

  이처럼 양사가 부지런히 시제 차량의 완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육군 병기국은 안 그래도 촉박한 완성 시한을 히틀러 총통의 생일인 1942년 04월 20일로 조정했다.

  헨쉘사는 이에 따라 시간을 철저하게 맞추기 위해 근로자와 기술자들을 독려해 불철주야로 작업을 진행시켰고 마침내 1942년 04월 17일, 동프로이센의 라슈텐부르크에 위치한 총통 본영행 화물열차가 출발하기 약 40분 전에 간신히 시제 차량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완성된 시제 차량이 워낙 촉박하게 공정을 진행하는 바람에 주행시범도 못해보고 화차에 적재되었다는 점이지만.

  반면 포르쉐사의 VK4501( P )는 니벨룽겐베르케 공장에서 비교적 순조롭게 공정을 진행해 출고할 수 있었다.

  1942년 04월 19일, 마침내 양 사의 시제 차량을 적재한 열차가 라슈텐부르크에서 약 11km 떨어진 역에 도착해 하차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포르쉐사의 VK4501( P )가 하차되자마자 진흙탕에 처박히고 말았는데 이 광경을 목격한 헨쉘사의 수석 설계자인 쿠르트 아르놀트는 포르쉐 박사에게 자사의 시제 차량을 이용해 VK4501( P )를 견인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사실 쿠르트 아르놀트 입장에서도 아직 주행시범조차 하지 않은 자사의 VK4501( H )로 과연 VK4501( P )를 견인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여하튼 갈 길은 멀고 두 시제 차량이 극복해야할 코스 또한 험난했다.

  볼프스샨체( Wolfsschanze, 늑대굴 )로 불리기도 하는 총통 본영이 위치한 라슈텐부르크를 향해 주행하는 동안 두 시제 차량은 수차례의 고장을 일으키며 멈춰 섰고 그 때마다 기술자들이 들러붙어 수리를 하는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운 끝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내 히틀러 총통의 생일인 04월 20일을 기해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참관한 가운데 두 시제 차량의 비교 테스트가 실시되었다.

  이 비교 테스트에 양 사는 사운을 걸었고 최초로 실시된 최대 속도 시험에서 포르쉐의 VK4501( P )가 시속 50km로 1km 이상을 주파한데 반해 헨쉘의 VK4501( H )는 시속 45km로 850m 가량을 주행하는데 그쳐 참관단의 시선은 포르쉐의 VK4501( P )에 집중되었다.

  절대로 패배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쿠르트 아르놀트는 제국 군수상인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접근해 두 차량의 기동성을 시험할 것을 제안했다.

  아르놀트는 04월 19일, 라슈텐부르크로 이동해 오는 와중에 VK4501( P )의 선회력이 그다지 시원스럽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기동성 비교에서 헨쉘의 VK4501( H )는 비교적 대형의 차체임에도 불구하고 무리없는 선회 능력을 과시하며 VK4501( P )에게 기울어 있던 참관단의 시선을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구동방식에서도 포르쉐의 독특한 방식은 감점요인으로 작용해 최종적으로 헨쉘의 VK4501( H )가 Ⅵ호 전차로 채택되었다.

  이리하여 “티거”가 역사에 전면을 드러냈고 정식 제식명칭인 Panzerkampfwagen Ⅵ Ausf E. sd.kfz 181도 부여되었다.

[디펜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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