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2 스탈린 전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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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2 스탈린 전차 (1)
  • 이치헌 기자
  • 승인 2020.01.07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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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이름으로, 소련 최강의 전차 IS-Ⅱ( ИС-Ⅱ) “스탈린”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러시아 국방부)

 독소전 기간 중 가장 강력한 전차로서 활약한 IS-Ⅱ 스탈린 전차에 대해 알아보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름을 떨친 전차 중 T-34/85 못잖게 인지도가 높은 것이 바로 IS 시리즈, 그 중에서도 IS-Ⅱ다.

  그 IS 시리즈 중 가장 방어력이 우수한 괴물 IS-Ⅲ가 있지만 IS 시리즈 중 실질적으로 베를린 함락까지 참여한 IS-Ⅱ를 소개한다.

 

   준비되지 못한 소련군의 참극,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6월 22일, 오페라치온 “바르바로사”( Operation "Barbarossa", 바르바로사 작전 )가 발동되며 독일군의 대군이 소련(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 영내로 밀려들었다.

  이른바 “독소전”, 러시아에서는 “대조국 전쟁”으로 불리는 4년 간의 대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독소전은 사실상 절대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나치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 조약이 체결될 시점부터 이미 예견된 전쟁이었다.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발트해 연안의 3개국을 분할 점령함으로써 파시즘( 혹은 나치즘 )과 공산주의의 맹주가 ‘아찔한 동거’를 하던 와중에 1940년, 독일은 불완전한 전력으로 도박을 감행해 프랑스를 단숨에 석권하여 자신감을 고취시켰다.

  소련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고 독일의 위협에 대응해 기계화 군단의 신편성을 서두르는 한편 미하일 일리이치 코시킨( Михаи́л Ильи́ч Ко́шкин, 1898~1940 ) 기사의 걸작 T-34/76 전차의 배치도 서둘렀지만 시간은 너무나도 촉박했다.

  무엇보다 스탈린 자신이 감행한 예조프시나, 이른바 대숙청을 통해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와 같은 유능한 고위 장성( 당시 소련군의 원수 5명 중 3명이 숙청되었다 )과 지휘관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투옥됨으로써 소련군의 사기와 기강은 말이 아니었고( 무기와 병력은 있어도 이를 효과적으로 지휘할 능력 있는 지휘관이 없었으니 말이다 ) 그러는 사이에 히틀러 총통은 1940년 12월을 기해 총통훈련 21호를 발령, 소련 침공준비를 지시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41년이 되면서 독일 국방군과 동맹국의 병력이 서서히 소련 국경일대로 집결하기 시작했는데 그 수는 어림잡아도 300만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소련 정보기관 산하 스파이들로부터 독일의 침공 징후를 알리는 정보가 속속 들어왔고 NKVD( 내무 인민 위원회 ) 역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문제는 스탈린이 독일의 침공 징후를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상당히 낙관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 독일과 영국 간의 영국 본토 항공전( Battle Of Britain, 007 시리즈로 유명한 가이 해밀턴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가 1969년에 개봉했다. DVD도 출시 )이 격화되고 있어 설마 올해 자신들을 침공할까? 하는 판단을 한 것이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데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와 프랑스에 동시에 선전포고를 해 동서 양 전선에서 압박을 받다가 참패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히틀러 총통이 똑같은 전철을 밟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독일군은 그러한 스탈린의 예상을 깨고 과감하게 1941년 6월 22일, 소련 침공을 단행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던 시점까지 소련군은 국경지대에 상당한 전력을 배치시켜 두었는데 다른 것은 전부 제껴두더라도 배치에서 상당한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소련군은 국경지대에 방어가 아닌 공격대형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전력을 단순히 공격 대형으로만 배치해 둔 상태에서 이를 지원해야할 비행장이나 충분한 방어 시설이 전무했다는 점!

  만약 이 상태에서 독일군이 먼저 선제공격을 감행한다면 이렇다할만한 방어시설이나 방어계획도 수립되지 않은 소련군이 어떤 상황에 처할 지 안 봐도.

  당장 지각있는 지휘관이라면 상부에 건의해서 이 문제투성이 배치를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겠지만 예조프시나로 인해 당시 야전군 사령관 15명 중 13명이 숙청당했던 악몽을 경험한 소련군 장성들은 그저 묵묵히 “우리는 지도자 동지의 명령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야”식의 반응이었고 그것으로 국경지대에 배치된 소련군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독일의 소련침공

  마침내 D-데이가 밝아오면서 독일군과 동맹군이 일제 포격과 함께 소련 국경을 넘어 전면 공세에 나서자 소련군은 첫 날부터 대 혼란에 빠져버렸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 대비한 작전 계획이 제대로 수립되지도 않은 상태였고 현지 지휘관들은 냉정하고 정확한 명령을 내리기 보다는 그저 스탈린이 평소 강조해온 교시( “현 진지를 고수하라. 성공한다면 귀관에게 영웅 칭호가 내려지겠지만 실패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에 따라 맹목적으로 현 위치를 고수하게 하고 독일군을 향해 부하들을 돌격시키는 만용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른 결과는 대단히 처참한 것이었다.

  수적으로 독일군에 비해 압도적이었던 소련 기갑부대는 고철로 변해버렸고( 그 중에는 이제 막 배치가 진행 중이던 T-34/76과 KV-Ⅰ중전차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 12월, 모스크바 문전으로 밀려날 때까지 소련군은 포로만 무려 2,400,000명 이상을 기록하는 참패를 당했다( 사상자는 정확한 집계조차 곤란한데 이는 공산권이 사상자 집계를 형식적으로 처리하는 통에 정확한 산술적 통계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

 

   T-34/76에 맞선 독일의 두 맹수, 대항마 스탈린의 등장   

  당시 소련은 교육훈련의 수준이나 실전 경험, 군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에서는 독일에게 열세였지만 전차 부문에서는 당시 독일군이 보유한 그 어떤 전차보다도 우수한 두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바로 T-34와 KV-1( Танк КВ-1 )이 그것!

  크리스티 현가장치를 개량해 적용한 쾌속전차 BT에 경사장갑과 직경이 큰 보기륜을 부착한 후 폭이 넓은 궤도를 두르고 대구경 76.2mm 전차포를 탑재한 T-34/76은 초반에는 1~2대씩 어슬렁거리다가 독일군의 집중 포화를 얻어맞아 격파되어 이렇다 할 전과를 거두는데 실패했지만 독일군을 경악시켰고 중장갑을 두른 KV(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의 이름을 땄다 )-1은 아예 “괴물”이라는 별칭을 얻기에 충분했다.

  독일군은 T-34/76으로도 모자라 아예 중장갑을 두른 “맷집”( PC 게임으로 이해하기 좋게 예를 들자면 스타크래프트의 “울트라리스크”나 C&C : 제너럴의 “오버로드”를 연상하면 된다 )으로 밀어붙이는 KV-Ⅰ에 절망어린 비명을 질렀고 이 두 전차 모두 잘 나가던 대전차포인 37mm Pak 35/36으로는 이빨 자국 하나 낼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졌기 때문에 75mm Pak 40과 같은 대구경 대전차포를 투입함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88mm Flak 36 중( 重 )대공포까지 끌고 와야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 자명했고 전차의 적은 어디까지나 전차!
  당연히 적 전차에는 이에 맞설 수 있는 보다 강력한 전차로 맞서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에 따라 독일군은 주력전차인 Ⅲ호 전차의 주포를 50mm kwk 38 L/42로 교체한 J형 등을 투입했지만 이 정도로는 택도 없었기에 결국 주포를 75mm kwk 40 L/43으로 교체한 Ⅳ호 전차 F2와 같은 개량형을 투입했다.

  그러나 Ⅳ호 전차는 방어력 면에서 불리한 요소가 많았기에 아예 새로운 전차를 개발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T-34/76과 KV-Ⅰ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두 맹수를 전장에 풀어놓으니 바로 Ⅴ호 전차 “판터( Panther, Пантера )”와 Ⅵ호 전차 “티거( Tiger, Тигр )”였다.
  
  여하튼 가장 먼저 실전에 투입된 Ⅵ호 전차 “티거”는 1943년 레닌그라드 남동부에서 소련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최초 투입된 4대를 전량 손실하는 참패를 당했다.

  그 결과 소련군은 멀쩡한 상태의 티거 전차를 대거 손에 넣는 횡재를 누렸는데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이렇게 획득한 티거 전차를 정밀 분석한 결과가 절망 그 자체였던 것!

  전면 장갑 102mm에 강력한 88mm kwk 36 L/56 전차포는 KV-Ⅰ은 둘째로 치고 T-34/76도 일격에 격파할 수 있는 위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이제 우리 큰일났다”는 입장이었고 당장 이 전차에 대항할 신형 전차의 개발에 착수해야 했다.

 

   한계를 장점으로, 스탈린의 태동 

하지만 전차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당시 소련이 보유한 T-34/76이나 KV-Ⅰ이 그렇게 나쁜 방어력을 보유한 차량도 아니었기에( 적어도 1943년 초까지 T-34/76과 KV-Ⅰ은 기동력과 방어력 면에서 독일전차들과 대등했다. 물론 독일군이 전차의 주포를 신형으로 교체하고 대전차포 역시 75mm Pak 40과 같은 강력한 녀석을 투입하면서 위협이 되기는 했지만 “티거”와 같은 괴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 우선 이 두 전차의 주포를 보다 강력한 신형으로 교체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소련은 멀쩡한 상태로 획득한 티거 전차에 다양한 포들을 동원해 관통력 시험을 수차례 실시, 가장 적당한 것으로 85mm 전차포를 선택했다.

  이 85mm 전차포는 1939년에 제식 채용되어 14,422문이 생산된 KS-12 85mm 대공포( 85-мм зенитная пушка образца 1939 года )를 전차포로 개량한 것인데 문제는 이 포의 개발이 상당히 지지부진해진 것이다.

  아무리 초속이 빠르고 탄도가 일직선에 가까워 직사화력인 전차포용으로 적합한 85mm 대공포라지만 적당한 교본이 있다하여 그렇게 쉽게 단기간 내로 완성시킨다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1943년 7월 5일, 독일군이 쿠르스크( Курск ) 일대에 공세를 개시하자 소련군 지도부를 경악시킬만한 전황이 보고되었다.

  비록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과 견고한 방어선에 걸려들어 독일 기갑부대는 전장의 고철로 변해버렸지만 선두에 선 “티거” 전차의 중장갑 덕분에 달려들었던 T-34/76 전차들이 대거 고철로 변해버린 것이다.

  특히 남부전선의 제48 기갑군단과 무장친위대 제2 기갑군단의 “티거” 전차들은 극히 적은 수임에도 불구하고 동부전선의 광활한 대지를 이용, 원거리에서 T-34/76과 소수의 KV-Ⅰ을 거뜬하게 격파했다.

  특히 기계적인 고장으로 인해 대거 전장에 유기된 제10 기갑여단의 신형 “판터” 전차들도 75mm kwk 42 L/70 전차포를 이용해 T-34/76과 KV-Ⅰ을 격파했으니 소련군 입장에서는 승리는 했어도 마냥 즐기기만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7월 12일, 프로호로프카( Прохоровка ) 전차전에서 파벨.A.로트미스트로프( Павел А. Ротмистров, 1901~1982 ) 소장이 지휘한 소련 제5 친위 전차군( 5-я гвардейская танковая армия )은 무장친위대 제2 기갑군단( 제1 친위대 기갑사단 “아돌프 히틀러”, 제2 친위대 기갑사단 “제국”, 제3 친위대 기갑사단 “해골” )에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가 도리어 막대한 손실만 입은 채 퇴각해야 했고 스탈린으로부터 남은 전차들을 참호에 파묻고 토치카로 운용하라는 치욕적인 명령을 수령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이 전투의 경과를 살펴본 소련군 지휘부는 이렇게 제5 친위 전차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무장친위대 제2 기갑군단의 기갑전력이 “판터”나 “티거”가 아닌 Ⅲ호 돌격포( Sturmgeschu"tz, 전차의 차체에 중장갑을 두른 고정 전투실을 얹은 보병 근접 지원용 자주포로 병과는 기갑이 아닌 포병 소속 )와 마더 대전차 자주포, Ⅲ호/Ⅳ호 전차였다는 점이다.

  1942년까지만 해도 T-34/76과 KV-Ⅰ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 독일은 전차의 주포와 장갑을 개량했고 여기에 칼 자이스, 라이카 등으로 대표되는 우수한 광학 기술력까지 가세하면서 소련군을 압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판터”나 “티거”가 보다 대량생산되어 전장에 투입되는 것을 염려하던 소련군 전차병들은 그 전까지 만만한 밥( ? )이었던 Ⅳ호 전차를 상대하는데 있어서도 적잖이 애를 먹게 된 것이다.

 

IS-85의 탄생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소련은 한시라도 빨리 T-34 전차에 85mm 주포를 탑재하는 것 못잖게 KV-Ⅰ의 개량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39년 12월 19일, 제식 채용된 KV-Ⅰ은 중장갑을 두른 괴물이었지만 덕분에 중량은 45톤에 달했고 V2 디젤엔진을 탑재했음에도 최고 속도는 시속 34km로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무장이라도 강력하면 위안이겠지만 주포는 T-34/76과 동일한 F-34( Ф-34, 76-мм танковая пушка образца 1940 года )! 문자 그대로 사람 속 터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나마 T-34/76보다 강력한 방어력( 차체 전면 장갑은 90mm 두께에 30° 경사각을 주었으니 )으로 1942년까지는 나름대로 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지만 독일군의 신형 대전차포와 전차포가 등장해 위협이 되던 찰나에 “판터”와 “티거” 두 맹수가 출현해 이제 기존의 KV-Ⅰ으로는 열세인 점이 명백해졌다.

  당시 2,769대가 생산되었던 KV-Ⅰ은 개량에 착수해야 했고 그 결과 장갑 두께를 강화하고 엔진을 12기통 600마력 디젤로 변경한 KV-13이나 전면 장갑 두께를 75mm로 줄이는 등 방어력을 희생시킨 대신 신형 변속기를 장착하고 기동력을 증대시킨 KV-1S를 총 1,370대 생산해 전선에 배치시켰지만 이 정도로는 택도 없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671대의 KV-1S 차체가 152mm ML-20S 곡사포를 탑재, 독일의 돌격포와 유사한 SU-152( KV-14 )로 생산되기도 했다.

  여하튼 쿠르스크 공세 개시 3개월 전인 1943년 4월, 소련군 지휘부는 기존의 KV 전차로는 “판터”나 “티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고 T-34 전차의 85mm 포 탑재 추진 못지않게 신형 중전차의 개발에 착수해 주포는 일단 85mm D5T( 훗날 T-34/85에 탑재된 S53은 아직 완성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를 탑재하기로 결정하고 체랴빈스크-키로프 전차 공장의 수석 설계기사인 요제프 야코블레비치 코친( Жозеф Яковлевич Котин, 1908~1979 )을 중심으로 신형 중전차의 설계에 착수했다.

  신형 중전차는 당시 KV-Ⅰ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 중이던 KV-13의 차체를 기반으로 신형 트랜스 미션을 채용하는 한편 차체를 보다 연장시킴과 동시에 85mm 포를 탑재하기에 적당한 대형 포탑을 장착하기 위해 포탑링의 직경을 보다 확장했다.

  1943년 5월 8일에는 시제 차량의 명명이 이뤄졌다.

  차량의 이름은 놀랍게도 당시 소련에서는 함부로 이름을 들먹이기조차 어려웠던 “위대하신”( ? ) 지도자 동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1879~1953 )의 머릿 글자를 따 ИС( IS )!

  차량에 탑재된 주포가 85mm D5T였으므로 정식 명칭은 ИС-85( IS-85 )가 되었고 흔히들 IS라 부르는 차량은 바로 이 IS-85를 가리킨다.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 원수의 이름을 딴 전차를 개량하여 최고 지도자 동지의 이름을 붙였으니 상관과 부하이면서도 필생의 정치적 동반자인 두 거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용명을 떨친 소련 중전차와 함께 오늘에까지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디펜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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