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2 스탈린 전차 (3)
상태바
JS-2 스탈린 전차 (3)
  • 이치헌 기자
  • 승인 2020.01.09 22: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실전에 투입된 IS-II 전차

 파시스트들에게 피의 복수를! IS-Ⅱ의 실전 투입

(사진: 디펜스 투데이)
제 2차세계대전에서의 IS-II 전차 (사진: 러시아 국방부)

IS-Ⅱ 1944년형은 1944년 춘계부터 생산에 돌입해 총 2,250대가 생산되었다.

  이전의 극초기형과 종전 이후 생산된 차량을 합치면 총 3,475대로 미국의 M26 퍼싱보다도 많은 수치인데 이처럼 대량 생산이 이뤄졌기 때문에 당하는 독일군은 지옥에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고 말았다.

  IS-Ⅱ는 “티거”와 마찬가지로 독립 중전차연대( 독일은 대대 )에 21대씩 배치되었는데 이 연대 3개를 통합한 중전차여단도 편성되었다고 한다.

  IS-Ⅱ의 첫 실전은 1944년 4월로 치가노프 대좌가 이끄는 제11 친위 독립중전차 연대가 타르노폴 인근에서 독일 국방군 제503 독립 중전차대대의 “티거”들과 조우전을 벌여 1대의 IS-Ⅱ가 격파되었다.

  티거 전차병들은 지금까지 봐왔던 소련전차와는 다른 거대 전차의 등장에 경악했지만 이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IS-II 전차의 활약

  1개월 후 루마니아의 티르구 프루모스 근교에서 대독일 기갑척탄병 사단( Panzergrenadier Division "Gross Deutschland" ) 소속 티거 중대와 IS-Ⅱ가 교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티거 전차 포수는 거리 3km상에서 자신이 발사한 88mm 철갑탄이 힘없이 튕겨져 나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다행히 중대장 B.클레멘츠 대위가 직접 전차대를 지휘, 3대의 IS-Ⅱ를 격파해 ‘기사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중대장 클레멘츠 대위를 비롯한 티거 전차병들은 이 거대한 전차의 출현으로 더 이상 동부전선에서 자신들의 우위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민감하게 깨달았다.

  독일군은 당장 이 괴물 전차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고심했지만 소련군은 그런 고심할 여유를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독일군을 완전히 자신들의 영토에서 몰아낼 대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작전 개시일자는 바로 3년 전, 독일군이 자신들을 침공했던 6월 22일로 정해졌다.

 

바그라치온 작전개시

  작전을 위해 약 1,254,300명에 달하는 대군이 집결했고 4,070대의 전차와 24,363문의 야포가 배치되는 등 대치하고 있던 독일군의 운명은 이것으로 결정된 셈이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러시아 국방부)

신형이자 지도자 동지의 이름을 딴 IS-Ⅱ로 구성된 수개 중전차연대 역시 공세에 참가했고 1944년 6월 22일부터 8월 19일에 걸쳐 벨로루시 일대에서 감행된 소련군의 바그라치온 작전( Oперация Багратион, Operation Bagration )은 대성공을 거둬 발터 모델 원수의 독일 중부집단군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IS-Ⅱ와 T-34/85 전차대를 앞세운 소련군은 함성을 지르며 독일군의 진지를 향해 돌격했고 무려 5,327대에 달하는 소련군의 항공기가 그들을 엄호했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은 52개 사단 40만명의 병력과 비전투 인원 40만명이 전부였고 야포 9,500문,전차 553대, 돌격포 480대, 항공기는 겨우 1,555대에 불과했다.

  이를 전선에 전개시켜 보면 보병 80명이 1km의 전선을 지키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연출되는 셈이니 독일 중부집단군에게 희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을 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8월 19일 작전이 종료될 시점에 독일 중부집단군은 29만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12만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5만명이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사실상 궤멸되고 말았다.

  물론 소련군도 전사자 178,507명을 포함 765,815명의 사상자를 내 독일군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점령한 지역에서의 징집을 통해 단시간 내로 피해를 복구할 수 있었다.

  바그라치온 작전으로 독일군은 소련 영내에서 완전히 추방당했고 이제 소련군이 베를린을 목표로 진격하는 상황이 되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소련군의 IS-II전차 (사진: 러시아 국방부)

 

새로운 강적, “티거Ⅱ”와의 만남 

바그라치온 작전 성공의 여세를 몰아 소련 기갑부대는 폴란드 영내로 밀려들어왔고 1944년 8월에는 비스툴라 강 일대에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격전에 돌입했다.

  IS-Ⅱ 역시 이제는 초기의 문제점을 개량한 1944년형이 어느 정도 배치되었기 때문에 1944년 전반기와 같은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1944년 8월 11일, 폴란드의 오글레도프 일대에서 소련 제6 친위 전차군 예하 53 파스토프 친위 전차여단( 53-я гвардейская танковая бригада ) 소속 T-34/85( 전차장 알렉산드르 P. 오스킨, А.П.Оськин )가 제16 기갑사단에 배속된 국방군 제501 중전차대대 소속 전차 3대를 매복 공격으로 격파하는 전과를 거뒀다.

  모처럼만에 전과를 거둔 오스킨과 전차병들은 전과 확인을 위해 잔해들을 살펴봤는데 이 전차들이 이전까지의 독일 전차와는 상이한 외형을 갖추고 있어 의아해했다.

  바로 독일이 티거의 후속으로 투입한 신형 Ⅵ호 전차 B형인 “티거Ⅱ”, 속칭 “쾨니히스 티거”라 불리는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신형 전차를 수령한 제501 중전차대대는 지난 달 초까지 보유하고 있던 45대의 티거 전차를 모두 손실한 이후 7월 14일, 신형 티거Ⅱ 부대로 재편성되어 8월 7일까지 45대의 차량을 수령했다고 한다.

  이후 폴란드 영내로 밀려오는 소련군을 막기 위해 열차로 이동, 오글레도프 일대까지 자력 주행을 했지만 이 과정에서 기계적 고장으로 인해 대열을 이탈하는 차량이 속출해 결국 8대만이 도착했고 8월 12일, 오스킨의 T-34/85의 매복에 걸려 3대를 격파당한 것이다.

  501 중전차대대로서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지만 이들은 티거 중대가 겪었던 괴물전차와의 대결까지 치러야 했다.

  다음 날인 8월 13일, 제71 친위 독립 중전차연대(  71 ОГвТТП )의 IS-Ⅱ 11대와 501 중전차대대의 티거Ⅱ 1개 중대 14대가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제71 친위 독립 중전차연대는 거리를 700~800m까지 좁힌 후 포화를 퍼부어 4대의 티거Ⅱ를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물론 그 대가로 3대의 IS-Ⅱ가 격파되고 7대가 손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신형 중전차와의 첫 대결에서는 판정승을 거둔 셈이었다.

  무엇보다 이 날 002호 차량을 소련군이 노획함으로써 티거와 마찬가지로 보다 정밀한 분석이 가능해졌다.

  501 중전차대대는 이 날 잃은 4대를 포함해 9월 1일까지 총 19대의 차량을 전투와 고장으로 손실하고 말았다.

  IS-Ⅱ 전차병들은 첫 교전을 승리로 장식했지만 전장에 방치된 티거Ⅱ의 잔해를 살펴보며 만만치 않은 호적수가 등장했음에 긴장을 늦추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도 3대의 전차를 잃고 7대가 손상을 입은 탓도 있지만 노획한 002호를 분석한 결과 기계적 신뢰성이 떨어지는 점을 제외하면 충분히 IS-Ⅱ를 위협할 수 있는 전차였기 때문이다.

  1944년 11월 12일, 마침내 티거Ⅱ와 IS-Ⅱ 전차대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인근에서 격돌했다.

  독일군은 제503 독립 중전차대대 소곡 차량들을 투입해 소련군의 공세에 맞섰고 양측은 수대씩의 차량을 손실했다.

  IS-Ⅱ는 티거Ⅱ의 88mm kwk 43 L/71포와 상극을 이루는 공격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장전 속도가 느리고 원거리 명중률에서 불리한 면이 있었지만 수적인 우세를 앞세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방어력에서는 약간 문제가 있었는지 IS-Ⅱ 1944년형은 1,800m 상에서 차체 전면이 관통되고 포탑 전면은 아예 2,300m에서 관통 당했다고 한다.

  1945년 1월 12일에는 제524 중전차대대의 티거Ⅱ와 IS-Ⅱ가 근접 전투를 벌여 양측 모두 극심한 손실을 입었는데 대전 말기로 갈수록 강판의 재질이 불량해지는 독일 중전차대와의 대결에서도 IS-Ⅱ는 고전을 면치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이 시기 독일 기갑부대는 사실상 궤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이제 IS-Ⅱ를 위협하는 것은 보병의 판저 파우스트와 판저 슈레케 정도였다.

  특히 판저 파우스트는 대전 말기 물자가 부족해진 독일이 유일하게 저렴한 단가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무기였기 때문에 적잖은 소련전차들이 피해를 입어야 했고 IS-Ⅱ 역시 다수가 피격되어 격파되었기 때문에 경계대상이 되었다.

  여하튼 IS-Ⅱ는 독일전차와 독일군의 치열한 저항을 물리치고 베를린 공략의 선두에 나서 마침내 독일을 무너뜨리는 선봉장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독소전 종전 이후의 IS-Ⅱ 

독소전이 소련의 승리로 종전된 이후 IS-Ⅱ는 후속 차량인 IS-Ⅲ의 등장으로 도태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소련은 일단 어느 정도 성능이 발휘되는 것이라면 마르고 닳을 때까지 쓰는 국가였고 유사시 바르샤바 조약국과 더불어 대규모 물량공세로 서부 유럽을 제압해야 했기 때문에 단 1대의 전차가 아쉬운 판국이었다.

  이 때문에 IS-Ⅱ는 급격히 구식화 되어가는 와중에도 계속 현역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또한 독소전 기간 중 폴란드군이 IS-Ⅱ를 제4 기갑사단에 배치시켜 운용했고 전후 유고슬라비아 등 새롭게 소련의 위성국으로 합류하거나 공산화된 국가들의 무장 강화 및 혁명 수출을 명분으로 공여되기도 했다.

  특히 국민당군을 몰아내고 제2차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끈 중국 인민해방군에도 판매가 되어 일부 차량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IS-Ⅱ는 1957년, 엔진을 V-54R-IS로 교체하고 신형 무전기와 보조 연료탱크를 장착하는 등 대대적인 현대화 개수를 받아 IS-ⅡM으로 변경되었는데 공산혁명을 일으킨 쿠바에 15대가 공여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주변국으로 공여되고 현역에 등재되어 있었음에도 IS-Ⅱ는 전쟁이 재발하더라도 이미 중전차를 대신할 주력전차( Main Battle Tank )인 T-54, 54A, 55가 그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점점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해갔고 일부 차량은 박물관이나 공원의 전승 기념물로서 전시되거나 영화 촬영소에 들어가 독일전차로 개조되는 등 한가한 일상을 보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IS-Ⅱ가 현역에서 해제된 것은 1995년이 되어서였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현역으로 보낸 셈이다( 실질적으로는 예비 차량으로 보관되거나 방치되었겠지만 )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러시아 국방부)

 

IS-Ⅱ 제원 

  종류 : 중전차( Тяжёлый танк )
  생산 : 1943~45
  총 생산대수 : 3,475대
  승무원 : 4명
  전장 : 9.83m
  차체 전장 : 6.77m
  전폭 : 3.07m
  전고 : 2.83m
  지상고 : 42cm
  중량 : 46톤
  차체 제조 : 고강도 주조 공정
  장갑 두께 : 차체 전면 120mm 60°
             전면 하단 100mm 30°
             포탑 전면 160mm
             포탑 측면 100mm
             차체 후면 60mm 49°
  무장 : 122mm D-25T 1문
  부무장 : DT 7.62mm 기관총
          Dshk 12.7mm 기관총
  최고 속도 : 시속 37km
  항속 거리 : 240km

[디펜스투데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