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Su-100 자주포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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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Su-100 자주포와 현재
  • 이치헌 기자
  • 승인 2020.01.1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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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진영에 공여되었던 소련의 SU-100 자주포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전쟁기념관 촬영)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SU-100 자주포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 인근에 거주하시는 분들은 전쟁기념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 특이한 차량 1대를 목격할 수 있다.

T-34/85, M46 “패튼”, M36 “잭슨”, M4A3E8 “셔먼”은 물론 K1의 시제차량까지 화려한 전적을 자랑하는 미군 및 한국군 기갑차량들 속에서 유일하게 고정 전투실과 56구경장 100mm 주포를 치켜세우며 돌격포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있는 특이한 차량.

바로 Su-100(Самоходная артиллерийская Установка-100, 100mm 자주포)이다.

 T-34를 기초로 한 돌격포 삼총사( Su-122, Su-85, Su-100 ) 중 가장 많은 생산량을 자랑함은 물론 현 시점까지도 일부 국가에서 예비 차량으로 굴러다니고 있는 “거물”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진영에 공여 

독소전의 승리 이후 1945년 6월 24일의 승전 기념 퍼레이드에서 당당하게 행진한 Su-100은 새롭게 공산진영에 합류한 주요 국가들에게 군사원조로 공여되었다.

우선 1951~52년에 폴란드군에 Su-100과 Su-122M 합계 173대가 공여된데 이어 1954년 12월 31일, 26대를 추가로 인도받았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소전 기간 중 넘겨받은 차량 외에도 1951~56년까지 1,420대를 면허 생산해 바르샤바 조약기구 산하국과 중동에 수출했고 일부는 지금도 가동 가능한 상태로 남아있다.

1952~56년 중에는 알바니아와 불가리아, 루마니아에 Su-100이 공여되어 발칸반도와 동유럽 일대에서 비교적 흔한 차량 중 하나가 되었다.

소련 입장에선 이미 종전 시점에서도 생산이 지속되고 있었으니 넘겨줄 수 있는 차량은 넉넉했고 덕분에 차량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러시아군에서는 무려 1995년까지 현역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

하지만 본토에서는 승전 분위기로 들떠 있던 시간 아시아 방면으로 진격한 제6 친위 전차군은 일본 관동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배속된 제208, 231 자주포 여단의 Su-100은 사실상 95식 경전차와 97식 중전차로 무장한 일본 전차부대를 간단하게 유린했고 이들이 상대한 것은 발악적으로 저항하는 보병들이 고작이었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아시아 방면에서의 격전도 종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독소전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한 소련은 이후 북한과 제2차 국공내전의 승리로 집권한 중화 인민공화국의 무장을 지원했다.

하지만 북한에는 굳이 Su-100을 공여해 줄만큼 한국군의 전차 전력이 전무한 만큼 오직 T-34/85와 Su-76M 대전차 자주포가 고작이었지만 중국은 혹시 모를 미군이나 대만의 장제스군 상륙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IS-Ⅱ와 Su-100, 그리고 T-34/85와 ISU-122/152 등이 판매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0분, 북한군이 제105 전차여단과 독립 전차연대의 T-34/85 150대를 앞세우고 남침을 감행해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러자 미국은 신속하게 본토에서 긁어모은 전차 전력을 한반도로 투입했고 제공권을 장악한 공군의 공습과 더불어 북한군은 졸지에 38도선 이북으로 밀려났고 1951년 직전까지 보유했던 대부분의 전차와 자주포를 손실하고 보병 잔당을 주축으로 산악지대에서 저항하는 신세에 놓였다.

마오쩌둥은 마침내 중국 인민지원군을 한반도에 투입했고 1951년부터는 전차 전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혹시 모를 미군과 장제스군의 상륙에 대비해 T-34/85나 IS-Ⅱ, ISU-122/152는 해안지대에 배치되었고 따라서 초반에 압록강을 건넌 것은 미국제 M3A3 “스튜어트” 경전차와 일본제 97식 중전차가 주력이었다.

이후 소련으로부터 추가적으로 들어온 T-34/85가 투입되었지만 당시 배치되어 있던 18개 전차연대의 상당수가 훈련 부족은 둘째치고 미 공군의 격렬한 폭격으로 인해 제대로 된 작전 수행이 곤란했기 때문에 마오쩌둥과 수뇌부는 고심 끝에 38도선 일대의 고지전에서 매복 및 화력 지원에 유리한 Su-100의 투입을 결정한다.

Su-100은 한국전쟁 기간 중 두각을 드러낼 정도의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고지 공략전에서 아군 진지를 격파하는데는 위력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서 1대의 차량이 노획돼 현재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독소전 이후에 생산된 차량이라 자료적 가치가 크다.

한국전쟁이 휴전된 후 Su-100은 19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봉기 진압을 위해 출동하여 민주화 바람을 잠재웠고 1968년, 프라하 침공에서도 T-54/55, T-34/85와 함께 활약했다.

이후 베트남에 공여된 Su-100은 낮은 차체와 정글이라는 지형적 이점을 살려 활약, 현재도 베트남군에서 훈련용으로 T-34/85와 함께 주행 중이다.

 

중동전에서의 참패 및 내전 참전

하지만 Su-100의 영광은 사실상 여기까지!

이후 1950년대 중동의 이집트와 시리아에 공여된 Su-100은 이스라엘 전차부대를 맞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이동표적으로 전락해버렸고(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군은 단숨에 51대의 Su-100을 손실했다 ) 지금도 웹상에서 2, 3, 4차 중동전쟁 당시 격파된 Su-100의 잔해 사진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1959년에는 쿠바에 Su-100이 공여돼 1961년의 피그만 침공 때 출동했고 이후 아프리카의 알제리와 모로코 분쟁 및 앙골라 내전 등에서 T-34/85, T-54/55와 함께 활약했다. Su-100의 마지막 실전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차후 외국의 침공을 우려한 티토의 무기 비축령에 따라 곳곳에 예비 장비로 비축되었다가 졸지에 서로 죽이는 데에 동원된다.

영화 속의 Su-100

Su-100은 전쟁 이후 시작된 냉전 기간 중 공산당의 선전전략에 따라 촬영된 전쟁영화에 골고루 출연했는데 현재 시점에서 아마존이나 오존과 같은 쇼핑몰에서 입수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은 “유럽의 해방”이지만 워낙 수가 많아서 정확한 집계가 곤란할 지경이다.

DVD 출시된 작품들이 꽤 있는데 개중에는 실물 Ⅳ호 전차들이 여전히 출연할 정도니 말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서방측에서 제작된 작품에도 적잖이 출연했는데 크리스토퍼 케인 감독의 Wheels of Terror( 1990 )와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의 알제리 전투( La Battaglia Di Algeri )가 대표적인 Su-100 출연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효율성을 입증한 무기체계인 돌격포나 구축전차는 현재 급격하게 발전하는 주력전차로 인해 사실상 대부분의 국가에서 도태된 상태다.

하지만 Su-100은 독일의 Ⅲ호/Ⅳ호 돌격포와 더불어 특유의 낮은 차체와 베이스가 된 T-34/85의 높은 기동력과 신뢰성을 바탕으로 매복 및 근접 지원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 성공적인 병기이자 우리에게는 악연까지 쌓았다.

비록 오늘날의 전장상황에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지만 적어도 그러한 방식이 통용되던 시절에는 위협적인 전차엽병으로 Su-100은 T-34/85 못지않은 차량이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유진우)

 

[디펜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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