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전차부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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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전차부대의 탄생
  • 이치헌 기자
  • 승인 2020.01.11 12: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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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지원으로 창설된 부한군 전차부대
(사진: 디펜스 투데이)
하얼빈에 입성하는 소련군 (사진: 러시아 국방부)

북한군 전차부대 창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38도선 북쪽 지역, 이른바 북한 지역에 입성한 소련군은 곧 당시 33세였던 김성주 대위(김일성)를 앞세워 공산정권을 수립하는 것 못잖게 조선 인민군(북한군)의 창군(創軍)을 위한 적극적인 지원을 나섰다.

  1946년 7월, 조선 인민군 창설을 위해 평양에서 개최된 제1차 회의 결과 3개 간부훈련소 및 1개 전차부대 창설이 결정된 후 계획은 급속도로 추진돼 1947년 5월 17일을 기해 3개 간부훈련소가 3개 보병사단으로 확대 개편 되었다.

  1947년 8월 중순 이후, 평양시 사동에 주둔한 소련군 제10 전차사단은 영내에 전차 및 기갑 병과 관련 3개월 단기 교육과정을 개설해 전차병으로 선발된 북한 간부 및 병사들을 교육시켰고 수료식을 마친 이들을 주축으로 12월, 제208 전차 훈련연대를 창설시켰다.

  제208 전차 훈련연대는 제10 기갑사단 인근에 주둔지를 구축해 12월 말을 기해 북한의 각 고등학교에서 선발된 400명의 인원을 대상으로 전차에 관련된 각종 교육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제10 전차사단의 T-34/85와 Su-76 대전차 자주포를 견습시켰다.

  1948년 초, 소련은 주한미군을 철군시킬 목적으로 북한에 주둔한 전 병력을 본국으로 철수시켰고 이에 따라 제10 전차사단 역시 귀국했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 인민군의 전차부대 훈련 및 확대 개편을 위해 한인 2세인 “표들” 중좌에게 T-34/85 150대와 전차병 300명을 인계해 북한에 잔류토록 했다.

  이들은 교관과 조교가 되어 제208 전차 훈련연대의 인원들의 지도를 담당했고 10월 말, 교육과정을 수료한 인원과 최초 제208 전차 훈련연대의 인원들을 주축으로 제115 전차연대를 정식으로 창설시켰다.

  조선 인민군 최초의 전차부대인 제115 전차연대는 T-34/85 10대를 인수했고 12월 3일을 기해 표들 중좌의 연대가 철수하면서 넘겨준 T-34/85 60대와 SU-76 대전차 자주포 30대, 모터 사이클 60대와 각종 차량 40대를 수령해 전력을 강화시켰다.

 

제115 전차연대 창설

  이에 따라 제115 전차연대는 T-34/85 70대와 Su-76 30대로 2개 전차대대와 1개 자주포 대대, 통신중대, 정비중대를 보유하게 되었고 초대 연대장으로 제2 보병사단 4보병연대장 류경수 중좌가 부임했다.

  1948년 12월 25일을 기해 모스크바에서는 조선 인민군의 전력 확장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고 이에 따라 제1 친위 전차군 사령관으로 독소전에서 활약한 영웅이자 기갑전의 전문가인 미하일 예피모비치 카투코프( Михаил Ефимович Катуков, 1900~1976 ) 대장을 주축으로 한 특별사절단 40명이 1949년 1월, 평양에 도착해 전차부대 확대 개편 및 훈련을 전폭 지원하게 되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카투코프 대장 (사진: 러시아 국방부)

평양 사동의 제115 전차연대 주둔지를 방문한 카투코프 대장은 도열한 T-34/85들을 바라보며 제1 친위 전차군 사령관으로 전선을 누비던 시절을 회상했다.

  이후 카투코프 대장은 동행한 쿠바노프 중장을 비롯한 사절단과 함께 동분서주하며 1950년 초까지 T-34/85와 Su-76 대전차 자주포, 모터 사이클, 각종 차량들을 북한으로 반입시켰다.

  이 시기 북한으로 들어온 T-34/85는 대부분 1945년 이후에 생산된 신품(新品)들로 니즈니 타길 제183 공장과 고리키 ‘크라스노예 소르모포’ 제112 공장에서 출고된 차량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화차에 적재되어 평양에서 하차한 T-34/85들은 곧바로 사동의 제115 전차연대 주둔지로 이동했는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니 바로 한반도 지형을 정밀 분석한 카투코프 대장이 한반도 지형이 동유럽의 평원지대와 달리 산악지대가 많아 전차부대가 기동하기에는 너무 협소하고 한국군에 전차가 전혀 없는데다 제대로 된 대전차 화기 또한 부족하다는 점을 종합해 최초 2개 전차사단 창설을 위해 지원하기로 했던 T-34/85 500대를 250여대로 감소시킨 결정 때문이다.

  T-34/85를 무상 공여가 아닌 엄연히 비용을 지불해 구입하고 있던 북한으로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고 이에 따라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대신 공군 전력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제105 전차여단의 창설

  1949년 5월 16일, 그 동안 증원된 T-34/85와 Su-76을 수령한 제115 전차연대는 여단 규모로 확대 개편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제105 전차여단이다.

  연대장 류경수 중좌는 ‘소장’ 진급과 동시에 여단장으로 부임했는데 여단은 제107, 109, 203 전차연대와 제206 차량화 보병연대, 그리고 Su-76 64대로 편성된 자주포 대대, 모터 사이클 200대가 편제된 제303 수색대대, 제506 통신대대 및 여단 공병대대, 수송대대, 정비대대, 의무대대로 편성되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조선족 팔로군 출신들로 구성된 모터사이클 303수색대대 (사진: 전쟁기념관 촬영)

 3개 전차연대가 보유한 T-34/85는 총 120대로 각 연대당 40대, 대대당 13대가 배치되었다.

  제105 전차여단 배치
  여단 본부 및 직할대 : 평양 사동
  제107 전차연대 : 평양 사동
  제109 전차연대 : 황해도 남천
  제203 전차연대 : 강원도 철원
  제206 차량화 보병연대 : 평양 사동
  제208 전차 훈련연대 : 평양 사동

  제105 전차여단의 창설로 북한은 여단급 전차부대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동시기 한국이 전차를 단 한 대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1950년 4월 말, 청진항을 통해 100대의 T-34/85와 60대의 Su-76, 트럭 150대가 추가로 하역되면서 북한군에 추가적으로 전차부대를 창설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1960년 T-34/85 전차는 183/112 공장 생산품들 (사진: 전쟁기념관 촬영)

이에 따라 6월 초를 기해 30대의 T-34/85로 편성된 독립 전차연대가 창설돼 유사시 북한군 제2 군단 예하 12 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을 지원하도록 했다.

  1950년 6월 중순 시점으로 북한군은 1개 전차여단과 1개 독립 전차연대를 비롯한 총 242대의 T-34/85와 Su-76 176대를 보유한 반면 한국군은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27대를 보유가 전부였다.

[디펜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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