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지 답사 - 안성 죽주산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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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지 답사 - 안성 죽주산성 (2)
  • 이승준 기자
  • 승인 2020.03.1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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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우의 전적지 답사 2

세계 최강의 군대를 격퇴한 죽주산성

  MBC에서 방영한 대하드라마 무신( 김주혁/이주현/박상민/정보석 주연 )을 보면 제19회부터 7차례에 걸친 몽골과의 대규모 전쟁을 다루었다.
  아마 전사에 관심있으신 분들에게는 거대한 대제국을 형성한 몽골군을 과연 어떻게 묘사하고 전투장면은 얼마나 사실적으로 연출했을까? 에 대한 궁금증이 다분했을 것인데 그 중 죽주산성 전투 역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살리타이( 撒禮塔 )가 지휘한 제1, 2차 침공을 통해 고려가 결코 만만하지 않은 국가라는 것을 간파한 몽골의 오고타이 칸은 제3차 침공부터 보다 병력을 증강하고 몽골 정규군의 비중(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제1, 2차 침공 당시 몽골 정규군의 비중은 낮은 편이었고 주력은 주변의 부족 및 정복지에서 징집한 인원들이었다 ) 또한 높여 탕꾸( 唐古 )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1235년, 제3차 침공을 감행했다.
  이 3차 침공에서 탕꾸는 군을 북로군과 남로군으로 나눠 당시 고려 조정이 위치하고 있던 강화도를 제외한 고려 전역을 초토화시키는 전술을 구사했는데 덕분에 국토가 황폐화되고 많은 인명이 살상당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침공 이듬해인 1236년, 경기도 일대를 초토화시키며 남하한 탕꾸의 주력군은 8월, 죽주산성에서 발목이 잡히게 되었다.
  신속한 기동전을 추구하는 몽골군이지만 이처럼 험준한 산악지대에 자리잡은 산성에 주둔한 고려군을 배후에 둔다는 것은 곧 병참부대를 비롯한 기타 지원부대가 측면을 기습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탕꾸로서는 반드시 이 성을 함락시켜 교두보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이리하여 흔히 죽주성 전투로 알려진 죽주산성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왜 산성이 고을의 주성( 主城 )이 되었는지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계실 것인데 이는 읍성( 邑城 )이 집중적으로 축성된 조선시대의 영향이 큰 것으로 당시의 일반적인 전술은 평시에는 행정치소를 교통이 편리하고 대규모의 인구가 거주할 수 있는 평지에 두었다가 전시( 戰時 )에는 방어에 유리한 산성으로 대피해 농성전을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훗날 제5차 침공 당시 방어에 실패해 많은 인명이 살상당한 춘주성( 春州城 ) 역시 별도의 읍성이 아닌 소양강변의 봉의산성( 이 성은 6.25 전쟁 초반 제6 보병사단의 춘천 방어전 당시에도 주 진지로 활용될 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이고 제1차 침공 당시 격전이 벌어진 철주성과 귀주성 역시 산성이라는 점은 평시 거주와 교통이 불편하더라도 방어에 유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제1, 2차 침공 당시 험준한 산성에 틀어박힌 고려군의 격렬한 저항을 맛본 바 있는 탕꾸는 다수의 병력과 공성장비, 전술을 동원해 단시일 내에 죽주산성을 함락시키고자 했지만 문제는 이 성의 방호별감( 竹州防護別監 )으로 부임한 송문주( 宋文胄 )가 몽골군과의 실전 경험이 풍부한 무장이었다는 점이다.


  송문주는 현재도 생몰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인물로 5년 전인 1231년, 몽골의 제1차 침공 당시 귀주성( 龜州城 )에서 성주이자 서북면병마사인 박서( 朴犀 )의 지휘 하에 분전하여 몽골군의 치열한 공세를 수차례 격퇴시킨 바 있는데 덕분에 적의 공성전술에 대해 이골이 날 정도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죽주방호별감으로 부임한 송문주는 현지의 치세에 전념하는 한편 중요한 요충지인 죽주산성( 아시다시피 오늘날의 안성이나 죽산면에는 읍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사실상 죽주산성이 유일한 방책이었다 )의 방어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늘날 남문 앞에 남아있는 외호 역시 송문주가 주도해 팠다는 자료가 있을만큼 그는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방어전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현지를 답사한 결과 몽골군이 집중적으로 공성을 할 수 있는 곳은 비교적 굴곡이 적은 외성 남문과 서문 정도로 한정이 되는데 이는 성의 주 출입문인 동문의 경우 바로 옆으로 계곡이 펼쳐짐은 물론 경사가 급해 공성장비의 접근이 어려운데다 양 능선 역시 높고 가파른 탓에 고려군이 석포( 石砲, Catapult )를 설치하고 돌을 날릴 경우 맥없이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외성 북문 역시 가파른 사면에 축조된 것으로도 모자라( 덕분에 이 구간의 성벽은 붕괴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 2개의 계곡이 전면에 자리잡고 있어 보병들의 접근이 그리 쉬운 편이 아니다.
  따라서 제1차 침공 당시 귀주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몽골군은 전반적으로 성의 전 구간을 타격해본 뒤 취약지점에 석포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공성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다만 대하드라마 “무신”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기마병의 현란한 궁술은 죽주산성에서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을 알려둔다.
  죽주산성의 성벽은 비봉산 자락 동쪽에 위치한 해발 250m의 취봉을 기점으로 약 200m 고도의 가파른 능선을 따라 축성되어 있는데다 성문 역시 진입로의 경사가 급하고 기마( 騎馬 ) 상태로는 통과가 어려울 정도로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몽골군으로서는 보병이 주력이 되어야함은 물론 산성이라는 특성상 운제( 雲梯 )나 누차( 樓車 )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이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에 달라붙어야하는 어려움을 안고 전투에 돌입해야 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초전부터 기선을 제압당한 몽골군

  1236년 9월 8일, 죽주산성 주변의 평야지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성을 포위하며 공성 준비를 마친 몽골군은 총 공격 명령에 따라 사방에서 몰려들어왔다.
  하지만 죽주산성의 고려군과 일반 백성 합계 총 3,000명의 인원은 숨을 죽인 채 몽골군이 사면을 기어올라오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
  마침내 몽골군이 석포의 유효 사정거리 내로 진입하자 송문주는 일제히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성의 남치성과 동치성, 북치성을 중심으로 주요 지점마다 설치된 석포들이 일제히 돌을 날리자 경사면을 기어오르는데 정신이 팔려있던 몽골군 보병들은 피할 틈도 없이 초반부터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순식간에 허를 찔린 몽골군이지만 그들은 중원을 호령했던 금을 멸망시킨 정예군이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 戰士 )들이었다.


  막대한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성벽으로 육박한몽골군 보병들은 일제히 사다리를 걸치고 끊임없이 기어오르는 한편 궁병들이 쇠뇌와 활을 동원해 엄호했다.
  하지만 죽주산성의 천연지형으로 인해 높이가 2.5~3m 남짓한 성벽임에도 그 실질적인 높이는 경사면까지 포함해 10m에 가까운 위압감을 자랑했고 워낙 지형이 높다보니 고려군의 인명피해는 예상 외로 경미한 수준인 반면 마땅히 은폐할 곳도 없이 밀집된 몽골군의 피해는 예상 외로 너무 큰 상태였다.
  결국 탕꾸는 병력을 일제히 후퇴시켰고 취봉 아래의 공격 개시선까지 퇴각한 몽골군은 전열을 재정비하며 안간힘을 써가며 석포를 성문 아래까지 전진배치시켰다.
  첫날 공세가 대실패로 끝나자 몽골군은 다음날부터 성문을 중심으로 한 저지대와 비교적 지형이 취약한 남문을 집중 공격, 전투 초반 석포를 대거 동원해 성곽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죽주산성의 고려군 역시 석포를 동원해 반격하는 한편 비밀리에 성문을 열고 병력을 출성( 出城 )시켜 반격하자 몽골군은 또다시 막대한 시체들만 남긴 채 퇴각해야 했다.
  석포까지 동원한 공격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탕꾸는 다시 화공을 시도했다.
  하지만 탕꾸는 자신이 시도하는 전술들이 모두 송문주에게 간파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귀주성 전투에서 2개월 가까이 혈전을 치르며 몽골군의 공성전술을 모두 파악하고 있던 송문주는 기름과 섶단을 들고 오는 몽골병사들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성문 뒤로 돌격대를 배치했고 몽골군이 근접해오자 바로 병력을 출동시켜 이들을 모조리 제압해버렸다.


  화공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몽골군은 다시 지하 갱도를 파들어갔지만 고대 아시리아 시대부터 가장 고전적으로 쓰인 이 공성전술을 모르는 고려군은 없었고 성내에서 대응 갱도를 파들어가 반격하자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모든 전술이 실패로 돌아가자 탕꾸는 우세한 병력을 활용해 성벽 근처까지 모든 중장비를 접근시켜 끊임없이 공세를 감행했지만 고려군은 요지부동이었고 특히 외성 동문 내부의 계곡에 형성된 풍부한 식수원 덕분에 장기간의 포위·고사 작전마저 어렵게 되자 결국 공성 15일만인 9월 23일, 모든 공성장비를 소각한 뒤 퇴각하여 남진을 계속하게 되었다.
  죽주산성 공성에 실패함으로써 막대한 인명피해만 입은 몽골군은 중요한 요충지인 죽주 일대의 경계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조·일전쟁과 죽주산성
 

고려시대 세계 최고의 정예군 중 하나인 몽골군을 격퇴시킨 죽주산성은 조선시대에 들어 1530년대에 한차례 보수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변형없이 세월을 보냈지만( 그 사이 고을의 이름도 죽산으로 바뀐 상태였다 ) 1592년 조·일전쟁을 맞이하며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지휘하는 조선군 8,000여명이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가 지휘하는 제1군 18,700명에게 몰살당하며 충주성을 내주자 사실상 주변 지역은 무인지대에 가까운 형국이 되었다.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게 된 고니시 유키나가 제1군은 폭우에도 불구하고 북진을 계속해 4월 30일, 여주에 도달하는데 이미 이 시점에서 죽산과 죽주산성 역시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간 셈이 되었다.


  이후 후속해 들어온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正則 )의 직할대 4,800여명이 죽주산성에 주둔하면서 충주성에 주둔한 하치스카 이에마사군 7,200명과 보급로 경비를 맡고있었다.
  당시 죽주산성 주변에서는 홍계남을 위시한 의병군이 일어나 일본군의 수송대와 소부대를 기습 공격하는 일이 잦았기에 공세 성향이 강한 맹장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보급로 경비라는 하찮은 임무를 수행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돼 있었다.
  그러나 당장 의병군의 전력으로는 죽주산성에 주둔한 후쿠시마 마사노리 직할대를 공격할 수준이 아니었기에( 1592년 9월, 후쿠시마 마사노리군의 전면 공격으로 의병장 홍자수와 이덕남이 전사하는 패전을 겪은 바 있다 ) 한동안 치열한 게릴라전만 전개되었지만 1593년으로 넘어가며 상황이 반전되었다.


  1593년 1월 6일부터 3일 간에 걸쳐 조·명 연합군의 맹공에 고니시 유키나가 제1군이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으며 평양성을 내주는 참패를 당한데 이어 소모사 변이중( 邊以中 )이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소 200여 마리를 모아 덮개를 씌운 우거( 牛車 )를 다수 제작해 학익진을 펼친 다음 죽산으로 진격하자 후쿠시마 마사노리군이 이를 맞아 돌진하여 나가에야리( 長柄槍 )와 일본도를 휘두르며 반격했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데다 일본군에 유리한 야전( 野戰 )을 벌이 탓에 조선군은 대오가 무너져 내렸고 이어 우거에 화공을 가해 모두 불태워 내부에 타고 있던  병력이 불타죽는 등 전세는 후쿠시마 마사노리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지만 때를 맞춰 서운산성의 홍계남 의병군이 구원 출동해 변이중의 본대를 완전히 궤멸시키는데 실패하자 죽주산성 주변의 전세는 일본군에게 큰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12일,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주요 부대가 행주산성 공략에 실패함은 물론 우키다 히데이에, 이시다 미츠나리, 킷카와 히로이에 등의 주요 다이묘들이 부상까지 당하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군의 사기가 급격히 오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에 호응하듯 충청도 조방장 황진이 1,000여명의 정규군을 이끌고 죽산으로 진입하자 죽주산성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보급로의 안정을 위해 이들을 격멸할 것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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