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의 육군 7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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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의 육군 7사단
  • 이치헌 기자
  • 승인 2019.11.17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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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제7보병사단 “칠성부대”의 전면 붕괴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30분, 개전 1시간이 경과된 시점에서 북한군 제3, 4 보병사단의 동두천-포천 공세가 시작되었다.

  제107 전차연대의 T-34/85 40대가 38도선의 철조망들을 으스러뜨리며 돌파구를 마련하자 제4 보병사단 예하 5, 16 보병연대 병사들이 그대로 후속해 ‘전곡 - 동두천’간 3번 국도를 따라 남진했고 제5 보병연대장 최인덕 대좌와 제16 보병연대장 박승희 대좌는 부하들의 진격을 독려하며 남하했다.

  이 때 상황을 우리 측 기록에는 제4 보병사단의 전(全) 연대가  투입되었다고 되어 있으나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을 상대로 용명을 떨쳤던 팔로군 출신들로 구성된 제18 보병연대는 의정부가 함락될 때까지 예비대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북한군 제4 보병사단이 38도선을 돌파하자 제7 보병사단 1보병연대장 함준호 대령은 예하의 1대대 3중대를 초성리(哨城里) 남쪽 176 고지에 배치시켰다.

  이 때 3중대원들은 제107 전차연대의 T-34/85 2대를 앞세우고 남하하던 제4 보병사단 소속 1개 대대를 기습 공격해 격퇴시키는 전공을 거둔 후 소요산에서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던 이의명 소령의 제2 대대에 배속되었다.

  이의명 소령의 2대대는 6월 25일 오전 11시까지 소요산 일대에 감행된 제4 보병사단의 공세를 지속적으로 격퇴시켰고 지원을 위해 투입된 이규삼 소령의 제5 포병대대 예하 2중대는 주저항선 남쪽에 위치한 보산리(保山里)의 임시 포진지를 점령한 후 남하하던 북한군 제4 보병사단 1개 대대에게 105mm 곡사포 사격을 가해 격퇴시켰다.

  그러자 제4 보병사단은 전열을 재정비하기가 무섭게 107 전차연대의 T-34/85를 앞세워 공세를 감행했다.

  문제는 전차를 집중시키지 않고 1개 중대 단위로 공격을 감행했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 동두천 북방 2km 지점의 창말고개에서 지형을 이용, 매복하고 있던 제1 보병연대 대전차포 중대가 막 고개를 통과하던 T-34/85 전차 2대의 측면에 M1 57mm 대전차포를 집중 난사해 모두 격파하는 전과를 거뒀고 후속하던 보병들이 초성리로 퇴각하면서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를 기점으로 제7 보병사단 “칠성부대”의 선전은 끝나고 말았는데 몇 차례의 공세 실패로 진격에 차질을 빚은 제4 보병사단장 리권무 소장이 제105 전차여단 참모들과 논의 끝에 전차를 집중시켜 공격하기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6월 25일 15시, 맹렬한 포격 속에 제107 전차연대의 T-34/85 대부분이 집결해 소요산 일대를 타격했다.

  이제야 제대로 된 기갑부대 운용에 눈을 뜬 북한군 앞에 이의명 소령의 2대대는 고전을 면치 못하며 일몰 직전 소요산 일대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말았다.

  제107 전차연대의 T-34/85에 올라탄 북한군 제4 보병사단 병사들은 그대로 동두천 시가지로 돌입, 6월 25일 자정까지 이어진 치열한 시가전 끝에 제7 보병사단 1 보병연대가 덕정으로 퇴각하면서 동두천은 개전 당일 함락되고 말았다.

  제7 보병사단 1보병연대의 동두천 패전은 곧 서부전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 1보병사단 "전진부대"의 후퇴

  아직까지 임진강 일대에서 북한군 제1 보병사단과 제203 전차연대를 맞아 분전하고 있던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는 졸지에 사단의 동측방(東側方)이 돌파 당함에 따라 부득이한 철수를 강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의정부 전면 방어선에 구멍이 뚫려버렸기 때문이다.

  한편 포천에 포진하고 있던 윤춘근 중령의 제7 보병사단 9 보병연대 3,400명은 제109 전차연대를 앞세운 제3 보병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리영호 소장의 제3 보병사단은 김창봉 대좌의 제7 보병연대, 김병종 중좌의 제8 보병연대, 김만익 대좌의 제9 보병연대와 안백성 대좌의 사단 포병연대로 완전 편성된 부대였으니 이 전투는 시작부터 균형이 맞지 않은 전투였지만 제9 보병연대 역시 열세의 상황 하에서 나름 분전했다.

  오전 4시 30분을 기해 맹렬한 공격준비 포격과 더불어 공세를 시작한 제109 전차연대의 T-34/85 3대가 철조망을 으스러뜨리며 43번 국도 상에 위치한 요지, 양문리에 배치되어 있던 제2 대대 7중대 진지를 향해 85mm 포탄 세례를 퍼붓자 7중대장 송영환 중위는 예하 소대들을 통솔해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제7 중대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던 이인호 대위의 6중대 역시 제325번 국도를 따라 남하한 제109 전차연대의 T-34/85들의 포격과 기관총 사격 아래 무너지고 말았다.

  동두천에서의 분전과 달리 포천은 서전(緖戰)부터 지리멸렬 그 자체였고 고전을 거듭하며 퇴각하던 6중대와 7중대는 설상가상으로 대대 본부와 연락마저 두절되며 삼성당리 계곡을 따라 포천 시내 방면으로 퇴각했다.

  한편 4시 30분을 기해 제2 대대장 전순기 소령으로부터 북한군 제3 보병사단의 공세를 보고받은 연대장 윤춘근 중령은 황급히 사단 사령부에 보고하는 한편 연대 전체에 비상령을 발동했다.

  동시에 금오리에서 비상대기 중이던 1대대장 류환박 소령과 3대대장 이철원 소령에게 천계산 424고지와 가랑산 350 고지에 걸친 증가진지를 점령해 최대한 적을 지연시켜 격멸할 것을 지시했다.

  2대대장 전순기 소령에게는 현 위치에서 최대한 적을 지연시키도록 지시하면서 연대 대전차포 중대장 허 현 대위에게는 중대를 이끌고 신속하게 요충지인 만세교로 이동해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게 한 후 연대 주둔지에 보관 중이던 M1 2.36인치 바주카포 12문을 긁어모아 2대대로 보냈다.

  한편 예하 2개 중대가 공백인 상황( 6, 7중대 )에서 개전 이후 4시간이나 분전한 2대대는 오전 8시를 기해 43번 국도를 따라 진격해 들어오는 T-34/85의 행렬을 목격했다.

  그런데 6, 7중대를 공격하던 T-34/85들과 달리 이들은 신속하게 남하하기 위해 고속 기동을 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208 고지 북익 기슭에 배치되어 있던 5중대 2소대장 이학봉 소위는 급히 M1919A4 기관총을 T-34/85 전차를 향해 사격하게 했다.

  그러자 만세교 북방 300m 상에서 멈춰선 T-34/85들은 포탑을 2소대 방향으로 회전한 후 85mm 포탄과 7.62mm 탄막세례를 퍼부었고 전차나 돌격포를 보유하지 못한 5중대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 때 허 현 대위의 대전차포 중대가 만세교 방어선에 도착해 주변에 M1 57mm 대전차포를 매복시켰다.

5중대에게 포탄을 퍼부으며 진격을 개시한 T-34/85가 대전차포 전방 50m까지 접근하자 허 현 대위는 일제 포격을 명령했고 정확하게 조준된 포탄이 그대로 선두 전차에 명중했다.

  “좋았어! 다음 녀석을 노린다!!”

절망에서 희색(喜色)이 만연한 대전차포 중대원들은 신이 나서 차탄을 약실에 장전했는데 순간 격파된 줄 알았던 T-34/85가 굉음을 울리며 그대로 주행을 재개했다.

  “이… 이건 말도 안돼!”

  선두 차량의 피격으로 대전차포 중대의 위치를 파악한 T-34/85들은 연신 포탄을 난사하며 만세교로 접근했다.

  교량을 통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훤했던 대전차포 중대원들이 필사적으로 수 발의 57mm 철갑탄을 T-34/85에 명중시켰지만 차체에 칠해진 페인트만 벗겨질 뿐 장갑판은 관통조차 되지 않았다.

  초기의 작은 성공으로 형성된 자신감은 사기에 영향을 끼치지만 만약 연이은 실패가 이어진다면 그것은 곧 공포로 확산되고 종국에는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병사들부터 무너지게 된다는 전장의 불문율(不文律)이 여기서도 적용되었다.

  T-34/85의 대열이 포 진지 목전에 다다르자 겁을 집어먹은 병사들이 포의 조준경만을 빼낸 후 포천 북방 5km의 신평리 방향으로 도주해버린 것!

  이렇게 9 보병연대 대전차포 중대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만세교를 통과한 109 전차연대의 T-34/85들은 그대로 포천 방향을 향해 남하했고 208 고지의 제5 중대 병사들은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다.

 

북한군 제3 보병사단의 맹공

  결국 육군본부는 부랴부랴 제3 보병연대를 포천 방면으로 급파했지만 이미 제9 보병연대의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 제3 보병사단의 맹공 앞에 축차투입된 연대는 무너져 내렸다.

  43번 국도 상의 송우리( 포천 남방 4km ) 일대에서 3대대 11중대장 이봉근 중위와 화기소대장 이정선 소위는 자신들의 전면으로 밀려든 T-34/85 10대를 맞아 57mm 대전차포와 2.36인치 바주카포로 저항했지만 전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85mm 포화에 사상자만 속출했다.

  곧이어 Su-76 대전차 자주포의 지원을 받은 제7 보병연대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옴으로써 전투는 끝이 났다.

  이로써 T-34/85를 앞세운 제3 보병사단은 제3 보병연대의 송우리의 방어선마저 무너뜨리며 포천 시내를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제1 대대 3중대장 조재준 중위의 지시에 따라 퇴각 중이던 3소대장 김학석 소위는 T-34/85와 Su-76 대전차 자주포를 비롯한 각종 차량 159대가 장사진을 이루며 포천 시내로 향하는 중이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북한군 제3 보병사단의 포천 함락 못잖게 시급한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제3 보병연대의 손실이 너무나도 컸다는 점으로 20시경, 1대대장 임백진 소령이 축석령에서 잔여 대대병력을 점호해본 결과 겨우 150명에 불과했다.

  1대대가 이 정도라면 2, 3, 4대대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고 동두천과 포천 전투는 전차 혹은 제대로 된 대전차 병기가 전무한 군대가 어떤 상황에 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디펜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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