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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준 기자
  • 승인 2020.03.17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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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9월 대공세 실패로 패주의 시작

북한군의 9월 대공세, 패주의 시작

막대한 병력과 전차를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지 못한 채 회복불능의 손실만을 입은 북한군!

이 시점에서라면 사실상 공세를 중단한 상태에서 일선 보병사단들의 재편성이 필요했지만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에 8월 21~30일에 걸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전력을 모조리 긁어모아 공세를 감행하니 바로 9월 대공세였다.

1950년 8월 31일, 북한군 5개 보병사단이 동원된 9월 대공세는 대구시와 영천군 일대에서 한국군과 미군을 포위/섬멸한 이후 부산을 점령한다는 상당히 무모한 수준이었다.

이를 위해 북한군 제1 군단은 제6, 7 보병사단이 정면의 미 제25 보병사단을 격파한 후 김해를 점령, 부산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계획은 참으로 그럴싸하지만 미 제25 보병사단에는 지원전력이 충분히 배속되어 있는데다 든든한 항공지원까지 버티고 있었다 )

이를 위해 제1 군단은 갓 전선에 도착한 제16 전차여단과 제105 전차여단의 T-34/85 일부가 배속되었다( 이 전력이 방어전에 투입되었다면 진격하던 미군 전차부대에 적잖은 타격을 입힐 수 있었겠지만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으니 )

다음으로 북한군 제2 군단은 왜관~포항에 이르는 전면에서 제1, 3, 13 보병사단이 왜관과 다부동 축선에 배치된 한국군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와 미 제1 기병사단을 격파한 후 대구를 점령할 예정이었다.

한편 제8, 15 보병사단은 한국군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와 제8 보병사단 “오뚜기 부대”를 격파한 후 대구, 경주 일대로 진출함과 동시에 부산으로 남하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이를 위해 제105 전차여단의 나머지 T-34/85와 제17 전차여단이 제2 군단에 배속되었다.

문제는 이들 전차여단이 사실상 북한이 보유한 마지막 예비 전차전력이었기 때문에 훗날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인천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에서 이를 저지할 예비 기갑전력이 부족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이 시점에서 낙동강 일대에 배치된 UN군의 전차는 500대를 넘어선 상태라 수적으로 T-34/85가 밀리는 상황이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미육군)

독소전 당시에는 독일전차들이 워낙 부족해 T-34/85가 질적인 열세를 수적인 우위로 보완할 수 있었지만 한국전쟁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따라서 9월 대공세는 개시 시점부터 이미 북한군의 파멸이 예고되어 있었다.

 

미군과 국군의 반격시작

경상남도 창녕군과 영산면 일대에서 미 제2 보병사단은 M26/M46 중전차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의 공세를 간단하게 격퇴시켰고 미 제25 보병사단 역시 전차와 포병, 공병, 공군의 유기적인 합동작전으로 북한군 제1 군단의 공세를 성공리에 격퇴했다.

영천군에서는 북한군 제8 보병사단이 제17 전차여단의 T-34/85 21대를 앞세워 공세를 감행했다가 한국군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의 방어선에 돈좌되었다.

또한 북한군 제15 보병사단 역시 제17 전차여단의 T-34/85 12대를 앞세워 제8 보병사단 “오뚜기 부대”의 정면을 타격했다.

하지만 이들을 맞이한 한국군 보병사단은 더 이상 개전 초의 빈약한 모습이 아니었다.

미국으로부터 M20 “슈퍼 바주카”와 75mm 무반동총을 보급받은 ‘청성’, ‘오뚜기’ 부대는 사단 자체적으로 대전차 특공조까지 편성할 정도로 대전차 전술에 숙달되었고 더 이상 T-34/85를 겁낼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행된 북한군의 공세는 결국 파국을 맞았는데 9월 2일, 한국군 제8 보병사단 19 보병연대 1대대는 특공조를 투입, 북한군 제8 보병사단에 배속돼 진격하던 제17 전차여단을 급습, T-34/85 7대를 격파하고 전차병 5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더욱이 제1 대대 뿐만 아니라 인근 대대에서 격파한 T-34/85는 총 21대로 사실상 제8 보병사단의 전차전력이 전멸한 것이기 때문에 제8 보병사단 VS 제8 보병사단의 대결은 한국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일시적인 승리 이후의 방심이 위험하다고 9월 5일 새벽 1시, 북한군 제15 보병사단장 조광렬 소장은 우천으로 한국군의 경계가 느슨해졌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T-34/85 12대를 앞세우고 일제히 야습을 감행했다.

이런 우천 하에서 야습을 감행해올 것을 예상치 못했던 제8 보병사단 “오뚜기 부대”는 순식간에 방어선이 붕괴돼 9월 6일 새벽 3시, 전략적 요충지인 영천군을 내주고 퇴각해야 했다.

제8 보병사단의 실패를 만회한 북한군 제15 보병사단의 영천 점령으로 중동부 전선에 구멍이 뚫리자 한국군은 부랴부랴 제6 보병사단과 제1 보병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씩을 차출해야 했다.

여기에 제2 군단장 유재흥 준장은 미 제8군 사령부를 방문해 전차전력의 증원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전차 1개 소대가 지원돼 영천 읍내 탈환에서 큰 활약을 펼쳐 북한군 제15 보병사단의 배후를 차단할 수 있었다.

결국 경주로 진격하던 북한군 제15 보병사단은 한국군 제8 보병사단의 맹공을 받아 궤멸당했다.

영천 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제15 보병사단은 T-34/85 5대, BA-64 장갑차 2대, 차량 85대 및 병력 3,799명을 손실해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했다.
한편 다부동 지구의 격전에서는 미 제1 기병사단이 한국군 제1 보병사단이 그토록 혹심한 피해를 입어가며 사수해낸 다부동을 북한군에게 내주고 마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제1, 3, 13 보병사단은 대구 점령을 위해 진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지만 B-29를 주축으로 한 미 공군의 융단폭격으로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으며 9월 12일에 이르면 전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세가 사실상 한계점에 봉착한 상태였다.

따라서 대구 전방 10km까지 밀려났던 미 제1 기병사단은 도시를 사수할 수 있었다.

북한군은 9월 공세를 통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T-34/85와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을 소진했고 이제 UN군의 반격을 막아내기에도 벅찬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미육군)

 

UN군의 반격과 T-34/85의 패주

북한군의 8, 9월 대공세를 저지해낸 UN군은 이제 수세(守勢)에서 공세(攻勢)로 전환된 전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8월 하순부터 전세의 역전이 확실해지자 맥아더 원수는 곧 상륙작전안을 구체화시켜 마침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고 다음 날, 그 동안 북한군의 공세에 시달렸던 분풀이를 하듯 낙동강 전선의 UN군과 한국군이 총 반격을 개시한 것!

이를 저지해야 할 북한군은 사실상 무모한 공세를 위해 13개 보병사단과 3개 전차여단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다가 태반을 손실해 사기가 극도로 저하돼 있었고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경인지방에는 인천경비여단과 제9 보병사단, 그리고 새롭게 편성된 제18 보병사단과 1개 연대 규모의 T-34/85가 전부였다.

반면 한국군은 낙동강 전투 기간 중 꾸준한 증원으로 2개 군단 예하 6개 보병사단으로 재편성되었고 여기에 미군 2개 군단 예하 4개 보병사단, 그리고 영국군 1개 보병여단이 400대 이상의 전차를 앞세워 반격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이 중 미 제1 해병사단과 육군 제7 보병사단, 그리고 한국군 제17 보병연대와 제1 해병연대 도합 75,000명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지만 낙동강 전선에는 여전히 157,000명의 병력이 포진해 있는 상태였다.

반면 이를 저지할 북한군 제1, 2 군단의 잔존 병력은 겨우 70,000명에 불과했고 T-34/85는 60대도 안되는 적은 수만이 남아있어 이제 북한군은 UN군의 반격을 저지할 시기마저 놓친 격이 되고 말았다.

[디펜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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