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34/85의 패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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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34/85의 패퇴
  • 이승준 기자
  • 승인 2020.03.17 0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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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낙동강 방어선, T-34/85의 떼죽음

 대전 전투 이래 다시금 격돌한 북한군 제4 보병사단과 미 제24 보병사단은 8월 5일 야음을 기해 혈전(血戰)을 전개했다.

워낙 방어정면이 광대한데다 공세의 주도권을 북한군이 쥐고 있었던 만큼 제24 보병사단은 수차례 침투와 기습을 반복하는 북한군 제4 보병사단에게 영산 일대를 내주고 퇴각해야 했다.

이에 따라 8월 17일, 미 제1 해병여단은 북한군 제4 보병사단을 공격해 대봉리 능선 북단의 102 고지에 포진한 채 역습(逆襲)에 대비했다.

8월 17일 늦은 오후를 기해 북한군 제4 보병사단은 T-34/85 1개 중대( 4대 )를 앞세워 102 고지를 향해 진격해 들어왔고 이에 따라 미 해병대는 급히 전차중대의 M26 “퍼싱” 중전차 3대를 엄폐 진지에 배치한 후 75mm 무반동총과 M20 “슈퍼 바주카” 2문을 급히 배치시켜 조준을 한 후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미육군)

이에 출동한 P-51 “무스탕” 3대가 12.7mm 중기관총을 난사했지만 T-34/85는 끄덕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진해 들어왔다.


선두 T-34/85가 고갯 모퉁이에 모습을 드러내자 미 해병대원들은 즉시 M20 “슈퍼 바주카”를 사격해 궤도 부근에 명중시켰는데 피탄 각도가 맞지 않았는지 전차는 85mm ZIS-S53 전차포와 7.62mm DT 기관총을 사격하면서 주행을 계속했다.

따라서 해병대원들은 75mm 무반동총 2문을 차체를 향해 조준한 채 난사했지만 T-34/85는 여전히 지속 주행하며 이들을 향해 기관총을 사격했다.
결국 M26 “퍼싱” 중전차들이 엄폐 진지를 박차고 나와 T-34/85를 상대했다.

양 전차의 간격이 100m로 좁혀지자 미리 철갑탄을 장전해 놓고 있던 M26은 그대로 M3 90mm 전차포를 발사했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그토록 격파되지 않던 T-34/85가 그 자리에서 멈춰섰고 곧 두 번째 차량이 M20 “슈퍼 바주카”에 피격돼 격파되었다.

사전에 세 번째 전차를 노리고 있던 포수는 곧바로 도주하기 시작한 T-34/85를 초탄 사격으로 격파해버렸고 마지막 차량은 폭탄을 탑재하고 출격한 P-51 “무스탕”의 공습으로 격파되었다.

결국 이 날 전투에서 북한군 제4 보병사단은 투입한 T-34/85 1개 중대를 전멸당하는 피해와 사단 자체적으로도 막대한 손실을 입어 재정비를 위해 퇴각한 이후 인천상륙작전 시점까지 낙동강 공세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T-34/85들의 떼죽음, 무엇 때문인가?

개전 초 한국군 보병사단들을 잇따라 격파하며 화려한 전과를 거두었던 T-34/85!

하지만 낙동강 전선에 이르러서는 큰 활약은 고사하고 공세 시마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거나 아예 부대 자체가 전멸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개전 초 북한군은 T-34/85를 보유한 제105 전차여단의 3개 전차연대를 각각 제1, 3, 4 보병사단에 배속시켜 전술적으로만 운용했다.

원래대로라면 대단히 위험천만한 운용이 될 수 있지만 운 좋게도 한국군 보병사단은 전차중대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대전차 화기가 전무했기 때문에 이 운용체계가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T-34/85 덕분에 보병화기 체계에서 다소 열세를 면치 못했을 북한군 보병사단들은 큰 희생없이 한국군 보병사단의 방어선을 연이어 붕괴시키며 서울을 함락시켰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원래대로라면 제105 전차여단은 38도선의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하기가 무섭게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서울로 진격해 들어가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독일 국방군( Wehrmacht )은 빈약한 Ⅰ, Ⅱ호 전차가 주축이 된 기갑부대를 보유한 상태에서도 과감한 집중운용 방식을 통해 단시일 내로 폴란드 전역을 석권한 전례가 있다.

만약 북한군이 동일한 운용전술을 적용했다면 보병사단들의 희생이 좀 따르더라도 서울은 개전 3일 만이 아닌 당일에 함락될 위기에 처했을 수 있다.

전차부대가 미처 전선에 증원되지 못한 후방의 예비 보병사단들을 풍비박산(風飛雹散, 하나도 온전치 못한 채 모든 게 사방으로 날아가 흩어짐을 일컫는 말) 내버린다면 제 아무리 전방 보병사단들이 악착같이 저항한다 하더라도 진격에 이렇다 할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군 제7 보병사단 “칠성부대”는 T-34/85 부대의 포격과 기관총 사격만으로 2개 중대가 무너져 내림은 물론 일부 병사들이 공포에 시달리며 스스로 와해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더욱이 후방에서 증원된 기갑연대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의 37mm 포는 T-34/85의 전면 장갑에 이빨 자국 하나 낼 수 없는 빈약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북한군이 38도선 돌파 후 제107, 109 전차연대만 우선적으로 집중시켜 서울로 진격시켰더라면 제공권 상실에 관계없이 미군이 본격적으로 증원되기 전에 ‘부산’에 입성했을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한국전쟁의 전황은 전혀 상반되게 변했을 지도 모른다.

결국 북한군의 전술적인 전차운용에 겹쳐 서울 함락 이후 3일 간이나 지체함에 따라 시간을 번 한국군과 미군은 이후 오산 죽미령 전투와 천안, 연기군 일대에서의 패전과 더불어 대전 참패라는 악순환을 거듭했지만 효과적으로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킴으로써 낙동강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함은 물론 본토에서 증원된 전차대대의 M4A3E8 “셔먼”과 M26 “퍼싱”, M46 “패튼”을 한반도에 전개시켜 T-34/85를 수적/질적으로 압도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서라면 북한군은 M26 “퍼싱”과 맞상대를 할 수 있는 IS-Ⅱ/Ⅲ “스탈린”을 투입해야 했지만 소련 자신으로서도 함부로 공여해줄 수 없는 고가의 차량이었던 탓에 T-34/85만으로 전투를 치러야 했다.

그나마 이 차량들이라도 제대로 공급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낙동강 전투 시점에서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당해 연일 주간 폭격을 당한 북한군은 사실상 전차와 증원부대의 이동을 야간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던 탓에 진격속도가 더딤은 물론 적시에 전선에 도착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예비 부품의 부족으로 전투에서 혹사당한 T-34/85가 제때 정비를 받지 못해 고장을 일으켜 전차병들에 의해 유기되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특히 교량들이 공습으로 파괴됨에 따라 무리하게 하천을 자력 도하하면서 엔진에 무리가 발생, 전차가 고장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단순한 구조의 T-34/85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기계’는 ‘기계’일 뿐이었다.

따라서 낙동강 전선의 시점에서 북한군은 공세보다는 후방에 예비대를 확보하는 등 현 점령지의 유지와 방어에 착수해야 했지만 아직까지 부산을 점령하고 한반도를 공산화시킬 수 있다는 헛된 희망에 물든 지휘부의 망상으로 죽을 짓만 골라서 반복하는 꼴이 되었고 덕분에 수가 부족했던 T-34/85들은 무모한 공세에 투입되는 족족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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