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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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전투
  • 이치헌 기자
  • 승인 2020.03.27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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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국군과 미군의 패배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과 제1차 공세

  1950년 후반기, 서울 탈환 및 38도선 수복, 그리고 고대했던 평양 점령을 완료한 한국군과 미군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당시 북한군은 신의주 방면에 전력이 거의 소진돼 재편성을 요구하는 제1 야전군 예하 4개 보병사단과 동해안 지역의 제2 야전군 잔류부대를 제외하면 거의 궤멸직전의 상황이었는데 이에 따라 마오쩌둥은 전선이 한반도 밖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고 북한 정권을 구출하기 위해 10월 19일, 2개 야전군 예하 20개 보병사단과 4개 포병사단을 “인민지원군”으로 편성해 북한으로 투입시켰다.
 
  여기에 투입된 중국 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효율적인 전투 협조체계를 구축할 목적으로 양군의 대표 수뇌들로 구성된 연합지휘부가 창설되었다.

  이에 따라 전선에 작전을 실시하고 있는 북한군의 통제는 북한군 지휘부가 수행하되 언어가 통하지 않는 문제 해결 등을 목적으로 인민지원군 참모부에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북한군 대표가 파견되고 야전에 투입된 집단군 및 군단 참모부에도 통신장교를 주축으로 한 북한군 지휘부가 배치되었다.

  지휘 체계 정리를 완료한 중국 인민지원군은 우선 10월 25일부터 운산 서부와 상봉동, 희천 북방, 상계, 영풍리 일대에 제13 병단을 전개시켜 진격 중이던 한국군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 15 보병연대에게 공격을 감행한 것을 시작으로 제2 군단 예하의 6, 8 보병사단에도 공세를 감행해 진격을 돈좌시키는 한편 양 부대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는 전과를 거뒀다.

얘기치 못한 첫 전과에 고무된 중국 인민지원군 수뇌부는 즉각 10월 28일까지 예하 부대와 북한군을 전개시켜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때 부대 전개 상황을 살펴보면 우선 미 제1 군단이 진격 중이던 대령강 우측~고상동 지구에 북한군 제1 야전군을 전개시켜 방어선을 구축하게 하는 한편, 한국군 제1 보병사단의 전방 지역인 운산 북서쪽에 제39군을 배치시켜 대치하도록 했다.

또한 한국군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 전방에는 제40군을 배치시킴과 동시에 제38군을 희천 북방지역으로 이동시켜 제8 보병사단 “오뚜기 부대”의 진격을 저지시켰다.

동시에 한국군 수도사단과 제3 보병사단 “백골부대”를 격퇴시킨 제42군은 신풍과 상계 북방 및 영풍리 방어선에서 지속적인 교전을 통해 양 사단의 진격을 돈좌시키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전력은 여전히 한국군과 미 제8군이 우세했고 이에 따라 중국 인민지원군과 북한군 수뇌부는 협의 끝에 우선 영장과 상봉동, 희천지역을 돌파하는 역습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중국 인민지원군 제13 병단이 집결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중국 인민지원군 편제에서 군은 “군단”, 병단은 “군”에 해당된다.

  따라서 제13 병단은 우리 군 편제로는 “군단( Corps )”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야전군( Army )에 해당되는 대부대였던 셈이다.

 

청천강에서 중공군의 역습에 국군과 미군의 패배

  회의 결과 작전 계획이 수립되었는데 이를 살펴보면 제13 병단이 역습을 감행하여 한국군과 미군 사단들을 태천 지역에서 포위/섬멸한 뒤 바로 청천강까지 진출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예하 군( 군단 )에는 다음과 같은 임무가 부여되었다.
 
  우선 제39군은 태천 북방지역에서 농바동 방향으로 공세를 감행하여 38군과 포위망을 구축해 한국군 제1, 6, 8 보병사단을 격멸하고 제38군은 한국군 3개 보병사단을 궤멸시킴과 동시에 희천지역에서 농바동 방향으로 진격하라는 전문이 하달되었다.

  동시에 제40군은 영장과 상봉동 방어선에 미 제8군 예하 부대를 고착시킨 뒤 남동쪽 방향에서 타격하라는 지시가 전달되었다.

  여기에 한국군을 공격하는 제38군의 좌측면을 엄호할 목적으로 제42군 예하 125 보병사단이 신풍 방면에서 구당동 방향으로 공격하고 예하의 124 보병사단은 오리촌 방향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서가 도착했다.

  반면 전력이 빈약한 북한군은 오로지 방어에 전념할 것을 지시했는데 우선 북한군 제1 야전군은 현 위치를 방어하면서 미 제1 군단이 동주와 신의주 방향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따라서 이 방향에 방어 전력을 증강 배치하기 위해 중국 인민지원군 지휘부는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제1 야전군을 전진 배치시켰는데 덕분에 안 그래도 열세에 처해있던 한국군 제1, 6, 8 보병사단은 졸지에 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내전을 통해 단련된 중국 인민지원군의 정예 10개 보병사단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마침내 10월 29일, 동이 트자 중국 인민지원군 제39군은 예하의 116 보병사단을 선봉에 세워 과감한 공세를 감행해 영장 지역에 진출해 있던 한국군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 예하 11, 12 보병연대를 처참하게 유린하며 막대한 손실을 입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엄청난 손실을 입은 제1 보병사단은 즉각 15 보병연대를 후위에 세운 뒤 남쪽 방향으로 퇴각했다.

  하지만 제15 보병연대는 연이어 가해진 제116 보병사단의 맹공을 견뎌내지 못하고 단시간 내에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 인민지원군 제116 보병사단은 성공적으로 영장을 점령함은 물론 11월 3일까지 미 제1 기병사단을 타격하며 강동, 향자산 남쪽 방어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제40군은 10월 30일부터 예하 4개 보병사단을 투입, 공세를 감행하여 상봉동 남동쪽 지역에서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 예하 2, 19 보병연대를 궤멸시킨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려오는 중국 인민지원군을 막아낼 여력이 없던 제6 보병사단 사령부가 즉각 파멸적인 손실을 입은 2개 보병연대를 퇴각시키자 제40군은 즉각 이들의 뒤를 쫓아 농바동 방면으로 진격을 재개해 1월 3일에는 상구동과 동성을 연하는 지점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제6 보병사단의 패전은 끝난 것이 아니었는데 진격 중이던 제40군 예하 118 보병사단이 제50군 예하 148 보병사단과 연계하여 느닷없는 퇴각 명령에 따라 초산에서 남쪽으로 퇴각 중이던 제6 보병사단 7 보병연대를 고당에서 포위하여 격멸한 일이었다.

  개전 초 춘천대첩을 이루며 상승부대의 신화를 창출했던 제7 보병연대는 졸지에 중국 인민지원군 2개 보병사단에게 궤멸되며 개전 이래 실전으로 단련된 베테랑 장병들을 다수 잃는 등 문자 그대로 처참하게 찢겨지는 참패를 기록했다.

  훗날 한국전쟁의 굵직한 전투에는 꼭 이름을 올린 제38군 역시 데뷔전을 장식했다.

  10월 29일부터 공세를 개시하면서 우선 희천을 점령한 제38군은 곧바로 한국군 제8 보병사단 “오뚜기 부대”를 공격해 예하 10, 16, 21 보병연대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는 것을 시작으로 퇴각하는 사단을 추격, 남서쪽 방향으로 공세를 지속시켜 11월 3일에는 차작과 바봉을 점령하는한편 군 직할부대는 미 제1 군단 종심으로 60km나 진격하였고 제42군 주력과는 별도로 작전 중이던 예하 제125 보병사단이 덕천을 점령했다.

  한편 동부전선 역시 전세가 중국 인민지원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우선 함흥 방향에서 제42군 예하 124, 126 보병사단이 진격을 개시해 오리촌 지역의 미 제1 해병사단과 한국군 제3 보병사단 “백골부대”를 타격해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있었다.

  여기에 집결을 완료한 중국 인민지원군 제66군이 전선에 전개되면서 한국군 제1 군단과 미 제1 군단은 결국 청천강 방향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회로 북한군 제1 야전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제66군이 추격전을 벌이자 미 제1 군단은 후위를 방어하면서 안주시로 철수했다  느닷없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예하 보병사단들이 연이어 박살나자 미 제8군 사령부는 즉각 예비부대로 대기 중이던 미 제 2보병사단 “인디언 헤드”와 한국군 제2 군단 예하 제7 보병사단 “칠성부대”를 개천과 덕천 방어선에 집결시켜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지시했다.

  첫 데뷔전을 장식하며 북한 정권의 붕괴를 막는데 성공한 중국 인민지원군 제13 병단은 즉각 북한군 제1 야전군과 연계하여 공세를 지속해 11월 4일, 마침내 미군과 한국군을 청천강 너머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1950년 11월 5일, 중국 인민지원군은 안주 북방과 개천, 덕천 및 농봉 북쪽까지 진출해 청천강을 넘어 평양을 탈환할 기세로 진격했지만 이미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미 제2 보병사단과 한국군 제7 보병사단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진격이 돈좌되어 버렸다.

  이 시점에서 수송해온 모든 물자를 다 소진해버린 중국 인민지원군은 별 수 없이 공세를 중단하고 식량과 군수물자를 보충하는 한편 부대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차후 공세를 위한 중공군과 북한군 재정비

  하지만 현 시점에서 공세를 중단하더라도 중국 인민지원군은 이미 충분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1950년 10월 29일~11월 5일에 걸친 전투 결과 중국 인민지원군 제13 병단과 북한군 제1 야전군은 우선 신의주와 압록강 방면으로 진출한 한국군과 미군을 완전히 밀어냄과 동시에 두 번 다시는 이 지역에 대한 진출을 시도할 수 없도록 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고 산술적인 수치에서도 만족스러운 전과를 거두고 있었다.

  우선 중국 인민지원군 제38, 39, 40군은 한국군 제1, 6, 8 보병사단이 붕괴당하면서 4,000명이 ‘포로’로 잡힌다.

  여기에 중국 인민지원군이 질적으로 열세를 보였던 포병 전력을 보충해 줄 야포와 박격포 120문을 노획당함은 물론 수송수단에서도 상태 좋은 차량 400대를 피탈당함으로써 보급 차원에서도 전과를 거둔다.

  여기에 각종 총기와 기관총 등 중화기 및 각종 장비와 탄약들을 피탈당하여 노후화된 일본제 소총과 제2차 국공내전에서 노획한 미국제 총기들로 무장하고 있던 중국 인민지원군의 무장을 강화시켜 줬다.

  한편 제1차 공세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은 평균 45~50km의 종심 공세거리를 기록했고 1일 평균 5~6km를 진격했다.

  그러나 중국 인민지원군은 아직 예비부대로 남아있던 한국군 제7 보병사단 “칠성부대”를 비롯한 제2 군단의 주력을 궤멸시키는데 실패했고 여전히 청천강 이남에 남아있는 미 제8군 주력까지 잡으려는 차후 공세 준비에 착수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미육군)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미육군)

[디펜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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