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 너머 금천의 전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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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너머 금천의 전차전
  • 이승준 기자
  • 승인 2020.03.3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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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과 북한군의 공세에 금성천 이남으로 후퇴

중공군의 개입과 휴전

9월 28일, 서울과 대전이 수복되면서 10월 1일, 마침내 한국군 제3 보병사단 “백골부대” 23 보병연대가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자 미군과 UN군 역시 북진을 개시했다.

북진 과정에서 한국군 제1 기갑연대가 화차에 실려 전선으로 향하던 북한군의 T-34/85 6대, 야포 4문, 82mm 박격포 10문, 120mm 박격포 1문, 맥심/Dshk 중기관총 30정, DP 500정, PPsh 41 기관단총 3,000정, M1891/30 소총 5,000정 및 탄약 200만발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국군의 수도 사단과 제3 보병사단이 원산으로 진격하자 북한군은 부랴부랴 T-34/85 12대와 병력 20,000명을 급파해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게 했다.

하지만 미 공군의 지원 속에 한국군은 10월 10일, 오전 7시를 기해 제1 기갑연대 1대대가 원산 비행장을 점령한데 이어 오후에는 원산 시가지를 장악했다.

한국군이 북상하여 맹활약을 펼치자 미 제8군 역시 이에 질 수 없다는 듯 10월 8일부터 공세에 착수했는데 10월 9일, 금천에서 치열한 전차전이 벌어졌다.

금천은 오늘날의 개성 북쪽 30km 지점으로 평양으로 향하는 요충지였던 탓에 북한군의 저항이 예상 외로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은 제19 보병사단과 27 보병사단을 투입해 전면에 대전차 지뢰를 매설하는 한편 전선에서 가용 가능한 T-34/85와 Su-76 대전차 자주포를 총 동원했다.

미 제1 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은 예하의 3개 보병연대 중 제8 기병연대에 제70 전차대대 소속 M4A3E8 “셔먼” 중대를 배속시켜 전진시켰다.

이 때 북한군의 T-34/85들이 일제히 돌격해 오자 셔먼의 전차병들은 침착하게 포탄을 발사했지만 피탄 경사각으로 인해 근접거리에서 수발의 76.2mm 철갑탄을 얻어맞은 후에야 격파되었다.

이 날 전차전에서 T-34/85 8대가 격파되어 북한군의 예비 기갑전력이 거의 소진되자 전투는 미 제1 기병사단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10월 13일, 금천이 미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후 평양을 점령할 때까지 북한군의 T-34/85는 제대로 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한 채 이동 중 격파되어 집단으로 유기되거나 항공 공격으로 파괴되는 일이 빈번했다.

따라서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까지 북한군 전차부대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미육군)

 

중공군의 개입

1950년 10월 19일을 기해 북한으로 진입한 중공군은 총 18개 보병사단과 근무 지원부대를 합쳐 26만명에 달했지만 아직 전차부대는 진입하지 않았다.

당시 중공군이 보유한 510대의 전차 중 T-34/85는 200대도 되지 않는 수인데다 포수들은 2~30발 사격해본 것이 전부일 정도로 기량이 떨어졌기 때문에 1951년 초까지 북한에서 작전을 수행한 병력들은 북한군 전차부대의 지원을 받아야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중공군은 오랜 실전경험과 유격전 운용경험을 바탕으로 탁월한 전술을 이용해 한국군과 미군을 대파했고 특히 1950년 11월 24일에 감행한 크리스마스 공세 당시 중공군 제9 병단과 13 병단이 펼친 유인작전에 걸려든 미군과 한국군은 순식간에 포위돼 궤멸되었다.

흔히 말하는 “인해전술(人海戰術)”이 사용된 사례 중 하나인데 교묘하게 산 중턱에 참호와 유개호를 파고 매복하다가 일시에 2개 병단, 25만명의 병력이 튀어나와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 들어오니 그야말로 ‘사람의 바다’를 형성한 셈이다.

10월 25일, 중공군 제13 병단 예하 38군( 우리의 “군단” 편제 ) 예하 4개 보병사단이 덕천에서 한국군 제7 보병사단 “칠성부대”를 포위/섬멸하는 것으로 패전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제42군 예하 4개 보병사단이 영원에서 한국군 제8 보병사단 “오뚜기 부대”를 대파함으로써 이들이 소속된 제2 군단이 위기에 처했다.

마지막 남은 사단인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는 제7, 8 보병사단의 패잔병들을 수습해 방어전을 펼쳤지만 인해전술과 기습 공격을 병행하며 밀려오는 중공군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11월 27일, 한국군 제2 군단을 궤멸시킨 중공군 제38군과 42군은 미 제2 보병사단 “인디언 헤드”를 포위 공격했다.

순식간에 퇴로가 차단당한 미 제2 보병사단을 구출하기 위해 워커 중장은 급히 터키 여단과 미 제1 기병사단을 급파했지만 포위망 돌파에 실패했다.

중공군은 견고한 포위망을 구축한 채 미 제2 보병사단이 철수할 때를 노려 은밀히 예상 퇴로에 대규모 복병을 배치시켰다.

결국 11월 30일, 군우리와 용원리 사이의 10km 구간에서 철수하던 미 제2 보병사단은 이른바 “인디언의 태형”이라 불리는 대패를 당했고 보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전차, 차량 및 장비들을 손실함은 물론 부대 건재 자체가 무너지는 뼈아픈 손실을 입었다.

중공군의 우수한 전술과 북한의 산악지형 및 매서운 추위 속에 미군 기갑부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뻔 했지만 근본적으로 전차는 보병을 짓밟는 무기다.

 

장진호 전투

붕괴의 위기 속에서도 미군 전차들의 활약으로 중공군의 공세가 빈번히 실패로 돌아가는 일이 잦았는데 장진호 전투가 그러했다.

중공군 제59, 79, 89 보병사단은 유담리와 하갈우리, 고토리 일대에서 미 제1 해병사단을 완전히 포위한 후 이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대규모 인해전술을 감행했다.

하지만 M26A1과 M46 전차의 지원을 받은 미 제1 해병사단은 끝내 몰살당하지 않고 퇴각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차량이 중공군의 육탄공격으로 파괴되었지만 전차 본연의 임무는 완수한 셈이다.

1951년부터 3~5월 사이에 중공군의 T-34/85와 Su-100 돌격포가 배치되기 시작했지만 제공권을 상실한 상태에서의 전차 운용은 자살행위 그 자체였고 결국 휴전이 가까워지면서 고지에 구축된 엄폐호에 들어가 이동포대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연히 보병들이 전차를 앞세운 한국군과 미군의 공세 시마다 노획한 영국군의 크롬웰 전차나 M20 “슈퍼 바주카”로 반격하는 동안 T-34/85들은 후방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을 뿐이니 이렇다 할 활약을 기대하는 것이 어렵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휴전이 임박해지자 하나의 고지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중공군은 그 때까지 이동포대로 운용하던 T-34/85들을 빼내 최후의 공세를 개시했다.

이것이 바로 금성 지구 공세로 한국군은 압도적인 규모의 중공군을 막아내지 못해 금성천 이남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이뤄짐으로써 3년여를 끌어왔던 한국전쟁은 오랜 정전에 들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디펜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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