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오산전투

오산 죽미령에서 첫 참전한 미군의 패배

2020-03-14     이승준 기자

한강 방어선의 붕괴와 오산 전투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이정일 대령의 제8 보병사단 “오뚜기 부대”가 김창덕 소장의 북한군 제5 보병사단이 감행한 맹공에도 불구하고 질서정연하게 퇴각하여 30일, 제6 보병사단의 엄호 속에 충주 방면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한국군은 개전 초기 중동부 전선에서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지만 서부전선에서 승세를 타고 있던 제105 전차여단의 T-34/85들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서울을 장악한 북한군 제1 군단은 28일 야간부터 곧바로 한강 도하준비에 착수했다.

제1 보병사단이 군단 예비로 돌려진 상태에서 리영호 소장의 제3 보병사단은 용산에서, 리권무 소장의 제4 보병사단은 폭파된 한강 인도교 인근에 집결했고 방호산 소장의 제6 보병사단은 수색에서 적절한 도하지점을 물색했다.

문제는 당시 북한군이 보유한 도하장비의 부족으로 제 시간에 도하 작전을 감행하기가 어려웠다는 점!

그러나 한강 철교가 일부 구간만 파손되어 수리만 하면 언제든지 이용이 가능했다는 점이었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제1 군단은 3일 간에 걸쳐 전차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지닌 목재들을 준비해 은밀하게 한강 철교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7월 1일 새벽 4시, 한강 철교가 복구되자 제105 전차여단의 T-34/85 1개 중대(4대로 편성)가 신속하게 교량을 통과했다.

선봉 1개 중대가 무사히 교량을 통과했음을 확인한 제105 전차여단은 곧바로 화차에 T-34/85 1개 대대분(13대)과 엄호할 보병들을 태워 보냈다.

이렇게 무사히 한강을 도하한 제105 전차여단의 T-34/85 17대를 앞세운 북한군 제1 군단은 7월 3일까지 치열한 시가전 끝에 영등포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한강을 도하하기 전 대부분의 중장비를 유기하고 몸만 간신히 빠져나온 한국군으로서는 더 이상 T-34/85를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한강 방어선의 붕괴로 7월 초를 기해 북한군 제1 군단은 본격적인 남진(南進)에 착수했다.

그러나 북한군에게도 슬슬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으니 바로 6월 27일,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을 통해 UN군의 한국 파병이 만장일치로 가결(可決)되었기 때문이다.

북한군

UN사령부의 탄생

7월 7일에는 UN군 사령부가 설치돼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초대 UN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아직 한국군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으니 바로 7월 4일, 북한군 제1 군단이 영등포를 완전히 장악함에 따라 더 이상 수도권 방어가 어려워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한국군의 주요 사단 잔존병력들은 수원을 거쳐 평택 이남으로 퇴각하거나 안양을 지나 대전(大田)으로 퇴각했다.
수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한 북한군 제1 군단장 김 웅 중장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고 곧 제3, 4 보병사단에게 수원, 오산 방면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맞서는 UN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정보부는 그 실태가 대단히 한심한 수준이었는데 당시 미 극동군 사령부는 초기 북한군의 전투력을 4개 보병사단과 3개 경비여단으로 이뤄진 7만명 정도의 병력에 전차 70여대가 고작이라고 과소평가해버리는 과오를 범했다.

그러한 판단이 6월 29일 맥아더 원수의 한강 방어선 시찰 후 다시금 6개 보병사단, 3개 경비여단 및 전차 200여대로 바뀌기는 했지만 북한군을 우습게 보는 시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미군의 패배

미군의 북한군 비하 시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은 바로 오산 죽미령 전투였다.

당시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목적으로 큐슈에 주둔하고 있던 윌리엄 딘 소장의 미 제24 보병사단에 출동명령을 하달했고 이에 따라 딘 소장은 예하부대 중 구마모토현에 주둔하고 있던 제21 보병연대 1대대장 찰스 브래들리 스미스 중령( 1916~2004, 웨스트포인트 졸업, 준장 전역 )을 선발했다.

하지만 당시 스미스 중령의 1대대는 병력이 완전 편제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개전 시점에서 제24 보병사단은 편제 정원의 65%만 충원된 상태였다 ) 제21 보병연대장 스티븐스 대령은 모자라는 장교 및 부사관과 병사들을 3대대에서 차출(差出)하여 충원해주었다.

이에 따라 스미스 중령은 M30 4.2인치 박격포 2개 소대와 B,C 중대가 주축이 된 1개 대대 406명의 병력을 인솔해 우천에도 불구하고 7월 1일 오전 3시에 주둔지를 출발했다.

오전 8시 5분, 이다쓰케 공군기지(현재 후쿠오카 공항)에서 C-54 “창공지주(蒼空之主, Sky Master)” 수송기 6대에 분승한 스미스 중령의 부대는 13시를 기해 부산 수영비행장(지금은 벡스코 지역)에 가까스로 착륙할 수 있었다.

전황이 워낙 다급했기에 스미스 중령은 열차를 잡아타고 북상, 7월 2일 오전 8시에 대전역(大田驛)에서 하차했다.

7월 2일에는 밀러 페리 중령이 인솔한 제52 포병대대 A포대( 장교 9명, 부사관 및 병사 125명/M101 105mm 곡사포 6문 )가 LST(전차상륙함)를 타고 부산항에 상륙해 스미스 중령의 1대대와 합류하기 위한 북상을 개시했다.

7월 3일 오후에 대전에 도착한 제52 포병대대 A포대는 다음날 평택에서 스미스 중령의 1대대와 합류해 총 540명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Task Force “Smith” )로 완전 편성되었다.

7월 4일 오후, 오산 북방 3.5km 지점의 죽미령(竹美嶺)에 방어선을 구축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7월 5일, 북한군 제4 보병사단 및 제105 전차여단 107 전차연대와 격돌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미군의 참담한 패전 중 하나로 꼽히는 “오산 전투( Battle Of Osan )”다.

오산 전투 직전까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들은 퇴각하는 한국군 병사들을 바라보며 “이제 우리가 왔으니 북한군은 오줌을 지릴 것이다!”라며 북한군을 몹시 깔보았다.

 또한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 “미 지상군이 나타나기만 하면 한국군은 사기가 오르고, 북한군은 철수할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보도할 정도로 당시 미군의 정보부재와 오만함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7월 5일 새벽을 기해 요란한 굉음과 무한궤도 마찰음에 선잠을 깬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황급히 전투배치에 돌입했지만 그들의 눈 앞(목전, 目前)에 나타난 것은 단순히 1~2대의 전차가 아닌 T-34/85의 대군이었다.

개전 초의 손실을 어느 정도 보충한 제107 전차연대의 T-34/85들은 신속하게 남진할 목적으로 죽미령을 향해 돌진했다.
당시 제107 전차연대는 총 36대의 T-34/85를 2개 제대로 나눠 주력 33대는 선발대 8대와 본대 25대로 편제하는 한편 잔여 3대는 제4 보병사단을 엄호하며 남하했다.

 오전 8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전날까지 이어진 우천으로 인해 짙게 껴있던 안개가 걷히면서 모습을 드러낸 북한군 제4 보병사단과 T-34/85를 저지하기 위해 전방에 대전차용으로 방열해 둔 M101 105mm 곡사포에 포탄을 장전하였다.

“아직 기다려! 좀더, 좀더, 좀더! 지금이다! 사격!!”
마침내 최선두의 T-34/85가 방어선 전방 1,800m까지 근접하자 105mm 곡사포탄이 불을 뿜었다.
“펑~!”
“투-콰아앙~!”
“크르르르르르르~!” “끼리리릭! 끼기기기기긱~!!”

요란한 굉음과 함께 선두의 T-34/85에 105mm 포탄이 작렬했지만 놀랍게도 전차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접근해왔다.
이는 포병들이 대전차 고폭탄이 아닌 일반 인마 살상용 고폭탄( High Explosive, HE탄 )을 사격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로 당황한 페리 중령은 나머지 5문의 포들도 일제 포격을 감행하도록 지시했다.

죽미령 좌/우측 고지에 포진한 B, C 중대 역시 보유한 중화기인 75mm 무반동총 2정을 사격했지만 T-34/85들은 그대로 전진했다.
“도대체 뭐야?! 저 괴물은~!!”

스미스 중령은 포탄 세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유유히 죽미령으로 올라서는 T-34/85들을 바라보며 아연실색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되돌릴 수 없었다.
마침내 최선두의 T-34/85 2대가 죽미령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A포대는 부랴부랴 일본에서 겨우 6발만을 가져온 대전차 고폭탄을 장전해 발사했다.
“펑~!”

그러자 위풍당당하게 돌진해오던 T-34/85 2대가 그 자리에서 멈춰서며 침묵했다.

“휴~ 격파야!!”

A포대의 포병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후속해온 T-34/85들은 이를 간단히 무시한 채 곧바로 반격을 가해 대전차용으로 방열해둔 105mm 곡사포가 피격돼 포병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이제 죽미령 주변의 미군 진지를 완전히 파악한 전차병들은 가차없이 85mm 포탄을 난사하며 격파된 2대의 잔해를 도로 좌우로 밀어버린 후 죽미령을 통과했다.

31대의 T-34/85가 죽미령 고개를 넘어서자 A포대는 후방이 드러난 전차들에 105mm 고폭탄을 사격해 이 중 2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디펜스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