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75년 전 필리핀 탈환을 위한 주요 전투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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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75년 전 필리핀 탈환을 위한 주요 전투 개시
  • 이치헌 기자
  • 승인 2020.01.1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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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 전, 미군은 필리핀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가장 많은 섬인 루손이 침공을 받자,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장군은 1942년 일본으로부터 섬을 탈환하겠다는 공약을 완수했다.

1942년 일본인들이 필리핀과 하와이 사이의 거의 모든 섬을 지배했기 때문에, 필리핀에 도착하는 것은 과달카날, 사이판, 티니안, 타라와 그리고 펠레리우를 포함한 많은 섬들을 점령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섬들은 미국 항공기에 활주로를 제공하고 일본에 이를 거부하였다.

미 육군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는 1944년 10월 필리핀 레이테 만으로 돌아온다. (사진: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미 육군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는 1944년 10월 필리핀 레이테 만으로 돌아온다. (사진: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육해군 기획자들은 루손에 직접 타격하기보다는 먼저 필리핀의 레이테섬과 민도로섬을 남쪽으로 함락시키기로 했다. 1944년 12월 말에 민도로에 두 개의 비행장이 세워졌으며, 이 비행장은 루손에 항공기가 착륙할 수 있도록 하였다.

70여 척의 미해군 함대는 1945년 1월 9일 상륙이 이루어진 북서쪽 루손의 링가옌 만의 해변으로 6군단 17만5000명의 병력을 수송했다. 해안에 해상 폭격이 지원 되었다.

1월 15일 수도 마닐라에서 남서쪽으로 45마일 떨어진 곳에서 두 번째 소규모의 침공이 일어났다.

궁극적으로 10개 사단과 5개 독립 연대가 루손에 대한 조치를 취하여, 루손은 태평양 전쟁의 가장 큰 캠페인이 되었고 미국이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또는 남부 프랑스에서 사용했던 것보다 더 많은 병력이 투입되었다.

미군 장병들은 1945년 2월 말 필리핀 루손주 바우조 인근 발레타 고갯길을 통해 전투를 벌이고 있다(사진: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미군 장병들은 1945년 2월 말 필리핀 루손주 바우조 인근 발레타 고갯길을 통해 전투를 벌이고 있다(사진: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치열한 전투 끝에 1945년 2월 4일 제1 기병사단의 병력들이 마닐라에 입성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약 4,000명의 민간인 포로를 수용하는 수용소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인 마닐라를 해방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전투는 1945년 3월 4일 도시가 공식적으로 해방 선언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닐라 점령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직전까지 루손의 배후에서 계속되었던 싸움을 끝내지 못했다.

양쪽의 사상자는 엄청났다. 약 23만 명의 일본인들이 루손에서 목숨을 잃었다.

미국인 사상자도 많았다. 6~8군 지상전투 사상자는 1만380명, 부상자는 3만6550명이었다.

1945년 여름까지 미국인들은 일본 최고의 9개 사단을 파괴했고 루손에 대한 또 다른 6개 전투도 무력화시켰다. 전투로 인한 손실은 일본 공군력이 급격히 감소하여 전쟁 기간 내내 가미카제 작전의 사용이 필요했다.

멕시코군과 호주군도 루손 전투에 참여했으며, 필리핀 전투기도 매우 많이 참가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덧붙여서 전쟁 전후에 필리핀은 오늘날 괌과 푸에르토 리코의 지위와 유사한 미국의 영토였다.

1946년 미국은 필리핀을 독립 국가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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