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지 답사 - 안성 죽주산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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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지 답사 - 안성 죽주산성 (1)
  • 유진우 기자
  • 승인 2020.03.13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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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주산성의 중요성과 전략적 가치

[ 유진우의 전적지 답사 ]

세계 최강의 정예군을 격퇴시킨 안성 죽주산성( 竹州山城 )

예로부터 충주와 진천의 도로망이 합류하고 오늘날에도 경기도 북부로 이동하는데 최적의 지름길 중 하나로 꼽히는 죽주( 현재의 안성시 죽산면 )는 언제나 그 중요성이 부각되는 고장 중 하나였다.

따라서 통일 신라 진성여왕 5년인 891년, 기훤( 箕萱 )이 죽주산성을 장악하여 북원의 양길과 더불어 9년 동안 세력을 떨친 바 있고 유명한 궁예가 바로 그 막하에 있었음은 물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그 중요성이 부각돼 본시 산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에 불과했던 것을 오늘날의 대규모 성곽으로 확장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죽주산성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치열한 격전이 벌어짐은 물론 병자년 청의 침공 당시에도 조선군의 주둔지로 운용될 만큼 그 입지적 중요성을 입증했고 이에 따라 오랜 세월에 걸쳐 붕괴되었던 성곽을 2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단계적으로 보수하고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디펜스타임즈는 오랜 기간에 걸쳐 전사를 연재해 왔지만 직접적으로 전장을 둘러보지 못하여 당시의 상황을 보다 세밀하게 다루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죽주산성의 경우는 직접 현장을 취재함으로써 보다 세밀하게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친 치열한 격전도 함께 다룬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시작하며

  오늘날 안성( 安城 )이라는 고장을 보면 떠오르는 단어는 아마도 안성맞춤 혹은 안성탕면, 아니면 안성 세계민속문화축전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안성이라는 지명( 地名 )을 보면 뒤의 성( 城, Castle, Fortress )이라는 문자에서 뭔가 심오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즉, 견고한 성과 같은 방어시설이 있기에 편안하고 안락한 고장이라는 의미인데 실질적으로 고을을 방어하는 읍성( 邑城 )이 없는 안성에 과연 그만한 성이 있는가? 싶어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하지만 그 의문점은 지도를 좀더 자세히 보면 깨지게 된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원래 지금의 안성은 1914년 3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지금의 죽산( 죽주 )과 양성을 통합한 고장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는 시골에 가까운 몰골이 된 죽주가 실질적인 중심이었고 이 곳에 바로 중요 방어시설인 죽주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실제 죽주산성이 위치한 죽산면 매산리 근교에는 일정 간격으로 죽암대로와 중부고속도로 통영-대천 구간이 나란히 통과하고 있는데 교통의 중심이 지금의 천안-안성 구간으로 쏠린 상황에서도 이 성 앞을 통과하면 이천-장호원 방면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반대로 진천-충주 방면을 통해 대전을 경유, 전라-경상도로 직행할 수 있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이 성의 입지가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더욱이 당시 조선의 도로망을 고려했을 때 죽주산성은 수도 한양으로 올라가는 중요한 방어거점 중 하나였을 것임은 자명한 일인데 실제 고려는 이 성의 중요성을 감안해 원래 지금의 내성 구간에 불과했던 성을 식수원 확보가 용이한 지금의 규모로 확장개축했고 이 구간이 바로 몽골의 제3차 침공 당시 치열했던 죽주성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여기에 조선시대에 들어 다시금 수축하면서 방어가 취약한 내성 북벽 구간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중성을 추가함에 따라 죽주산성은 조선의 다른 산성에서 보기가 어려운 3중 구획( 이러면 흔히들 일본성을 떠올리기 쉽지만 )을 갖춘 견고한 산성으로 탈바꿈한 셈이다.

  이처럼 중요한 요충지에 견고한 3중 구획을 갖춘 죽주산성은 다행히 개발권과는 한참 떨어진 덕분에 비교적 원형 보존을 하는데 성공했지만 성이 위치한 구간이 워낙 경사가 급하고 지반이 취약한 탓인지 폭우 때마다 일부 구간이 붕괴되거나 산사태에 쓸려나가는 것은 취재를 통해 파악한 놀라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필자가 이 성을 조사하기 전 온라인 상의 답사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면 붕괴 위험 지점에 대한 사전 조사가 꽤나 치밀하게 이뤄진 것으로 보이며 일부 블로그에도 붕괴 지점들이 곳곳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은 2007년 6월까지 대규모 복원 공사를 통해 외성 남서벽과 북동벽의 대부분을 복원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북서벽과 남동벽 및 남치성 등은 미복원되어 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요새, 죽주산성

  이처럼 취약한 천연지형에 수시로 붕괴되는 일이 일상다반사임에도 삼국시대부터 이 곳에 성을 쌓은데는 전술( 前述 )한대로 교통의 요충지인 죽주 일대를 훤히 감제할 수 있고 지형 또한 방어하는 측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주산성은 축성될 때부터 다른 산성들과 달리 반드시 함락시켜야할 목표 1순위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최초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며 이 곳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간파한 뒤 지금의 내성 지역에 소규모 테뫼식 산성으로 축성할 당시만 해도 그리 눈에 띄지 않던 죽주산성은 통일 신라 진성여왕 재임 시절,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바로 이 지역에서 봉기한 기훤이 죽주산성을 장악하여 근거지로 삼게된 것이 시초인데 여기에 휘하 장수로 들어간 인물이 유명한 궁예( 弓裔 )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특히 KBS 1TV에서 방영한 태조 왕건을 통해 죽주산성( 물론 실제 장소에서 촬영하기가 애매해 문경의 조령원을 세트로 활용했지만 )과 기훤, 그리고 궁예의 활약 등이 묘사되면서 나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죽주산성의 전략적 가치

  하지만 죽주산성이 진정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바로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 이후에도 죽주의 전략적인 가치는 전혀 퇴색되지 않았고 특히 지금의 내성 바로 아래의 계곡에 위치한 풍부한 식수원과 더불어 이 성이 위치한 비봉산 자락의 험준한 지형( 실제 비봉산을 안성 시내 혹은 보개면 등에서 등반하더라도 쉽게 등반할 것이라는 착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을 활용하기 위해 고려 조정은 마침내 기존의 성곽보다 더욱 큰 규모의 외성( 外城 )을 축조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죽주산성의 규모를 확정지은 계기가 되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죽주산성 (사진: 디펜스 투데이)

새로이 축조된 외성은 비교적 지대가 높은 남쪽을 기점으로 가파른 계곡이 형성된 동문 성곽을 통과해 다시 북쪽의 계곡을 아우르면서 가장 높고 가파른 경사의 서쪽에서 끝을 맺는데 포곡식 산성의 취약점인 거대한 규모에 따른 저지대 방어의 취약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즉, 식수원 확보가 용이하지만 그만큼 지대가 낮은 계곡 방면의 방위적 취약성이 이 성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셈인데 실제 성을 둘러보면 이러한 문자적 설명보다 더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이처럼 최대한 지형을 활용하고 비교적 취약한 남문 앞에는 적 보병의 접근을 막기 위한 외호( 外濠 )를 파두는 등 자연 지형과 인공적인 장애물을 이용, 방어의 극대화를 꾀했다.

  이렇게 축성된 외성 덕분에 죽주산성은 풍부한 식수원과 대규모 인원을 수용하기 편리한 규모를 갖춤으로써 장기간의 농성전을 위한 준비를 모두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준비가 곧 진가를 발휘할 기회가 의외로 빠르게 찾아오게 되니 바로 몽골의 제3차 침공이 그것이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죽주산성 (사진: 디펜스 투데이)

[디펜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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