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지 답사 - 안성 죽주산성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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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지 답사 - 안성 죽주산성 (3)
  • 이승준 기자
  • 승인 2020.03.13 1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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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유진우 전적지 답사 3

완벽한 기습 탈환, 죽주산성 전투

  행주산성 전투의 승리 및 전면적인 일본군의 한양 퇴각 소식은 황진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우선 부대의 사기가 충천해진 것은 물론 주변 군민들까지 조선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죽주산성을 출입하며 후쿠시마 마사노리군의 부역( 負役 )을 하고 있던 군민들까지 황진군에게 성내의 상황을 낱낱이 전해줄 정도였다.
  이를 통해 황진은 공격 전부터 성내의 방비에 대해 소상히 파악하는데 성공, 견고한 죽주산성에 포진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군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전면 공성보다 기습을 통해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더 유리함을 간파하고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마침내 1593년 2월 28일, 황진군은 죽주산성의 진입로에 복병을 배치해 후쿠시마 마사노리군의 출성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주력은 죽주산성 부군 비봉산 자락에 대기시키면서 별동대를 투입해 일본군 수송대를 급습, 군량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자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이 기회에 눈엣가시인 황진군을 완전히 섬멸할 요량으로 날이 저물자마자 주력부대를 출성시켰는데 이들은 성을 나서기가 무섭게 매복해 있던 황진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단숨에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필자가 죽주산성을 답사한 결과 이런 식의 매복이 가능한 곳은 오직 계곡이 형성되어 있는 북문 근처뿐이기에 아마 당시에는 북문( 현재는 동문이 주 출입로 )을 주로 이용했으리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이를 신호로 황진의 본대는 일제히 총 공세로 전환해 내성 북벽과 접목되어 우선적으로 장악해야 하는 서문을 집중 공격했다.
  눈앞이 제대로 식별조차 되지 않는 야간인데다 주력 부대가 출성한 상태라 상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군은 졸지에 서문을 내주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 구간의 성벽 높이마저 낮으니 ) 곧바로 내성 북벽과의 교차 구간까지 장악한 황진군은 서벽을 따라 진격하여 남문까지 탈환했다.
  한쪽 구간을 내주면 곧잘 함락으로 이어지곤 했던 조·일전쟁 당시 조선 성곽의 단점이 여기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 셈이었다.


  한편 출성했다가 되려 매복 공격을 당한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황급히 퇴각했지만 이미 성의 일부 구간이 황진군에게 탈환된데다( 남문과 서문은 모두 죽주산성에서 가장 높은 구간에 축성된데다 가장 중요한 지점인 동문 내부의 계곡을 훤히 감제할 수 있는 위치다 ) 그 때까지 잠잠히 있던 성내의 군민들까지 들고 일어나자 졸지에 북문까지 내주며 동문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동문은 북문 내부와 더불어 죽주산성에서 계곡을 이루는데다 남문, 서문, 내성까지 장악한 황진군이 문 방향을 내려다 보며 공격을 감행할 수 있어 전적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군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졸지에 궁지에 몰린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혼란에 빠진 휘하 장병들을 독려하며 치열하게 저항하다 29일 동이 틀 무렵, 결국 죽주산성을 포기하고 수백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동문을 통해 충주까지 퇴각하고 말았다.
  완벽한 야간 기습 공격으로 4배가 넘는 적병을 무찌르고 천혜의 요새 죽주산성을 탈환한 황진군의 승리는 송문주의 15일 공방전과 더불어 한국 산성 전투의 대표적인 쾌거로 꼽히고 있다.


  조선 조정은 통렬한 승리를 거둔 황진을 2월 30일을 기해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승진시키고 3월 1일 교지를 내려 그 공을 치하했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조선시대 이후의 죽주산성

  황진군의 죽주산성 탈환 이후 충주-죽산-용인을 잇는 보급로가 차단되자 한양에 주둔한 일본군 주력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용산으로 잠입한 조선군 결사대가 일본군의 군량창고를 불태워 58,000명에 달하는 일본군 주력이 2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군량을 모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자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는 결국 4월 18일, 한양을 포기하고 경상도 방면으로 철군하게 되니 죽주산성 전투는 행주산성 전투와 더불어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전선이 남쪽으로 이동되면서 차츰 죽주산성의 중요성은 희색되었지만 1604년 10월을 기해 이유홍이 죽산부사로 부임하면서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실시돼 이듬해 6월 완공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죽주산성의 잔존 성벽은 대부분 이 시기에 완료된 것들이다.


  이 때 내성 북벽과 외성 동벽 교차구간에 포루( 그래서 흔히 북포루 혹은 북치성으로도 불린다 )가 신설되었는데 전면에 3개, 동문 방향으로 2개의 포좌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면 바로 내성 북벽의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중성( 中城 )을 새롭게 추가한 것이라 하겠다.
  이는 그저 가정집 담장과 같은 형태의 조선 성곽의 단점을 보완한 것으로 이로써 죽주산성은 외성, 중성, 내성의 3중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성으로 오인받기도 하는데 이는 전쟁 말기 순천 신성리성과 사천 선진리성, 울산성 공성이 모두 실패하며 받은 전훈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실제 조선군은 종전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서생포성을 그대로 사용했고 부산성의 지성을 중심으로 새롭게 부산진성을 축성하기도 했다 )
  하지만 이 수축 이후 죽주산성이 전장이 되는 일이 없었기에 산성의 전략적 가치는 퇴색하게 되었다.


  제2차 조·청전쟁( 병자호란 )의 발발 당시 조선군이 죽주산성에 주둔한 적은 있었으나 실제 전투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벌어진 탓에 임시 주둔지 역할에 그쳤고 1728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발발한 이인좌의 난 역시 출동한 오명항의 관군이 야전을 택해 안성 청룡산과 죽산 장항령에서 궤멸시킴으로써 수성전도, 공성전도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내륙 깊숙이 위치한 죽주산성은 이후 큰 변화없이 세월을 보냈지만 그나마 산성인 덕분에 개발의 물결을 피해가는데 성공했다는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취약한 지반과 잦은 산사태로 인해 성곽의 대부분이 유실되어 시대를 거치며 부분적으로 복원되고 다시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디펜스 투데이)

마치며

  현재 죽주산성은 2006년 12월 14일부터 2007년 6월 26일에 걸친 대규모 복원 공사 덕분에 외성 북벽을 제외한 상당 구간이 복구가 된 상태다.

  자세한 내용은 사진을 참고하면 좋지만 필자는 기왕이면 현지를 직접 답사해보는 것을 권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표현과 다양한 시각자료를 동원해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제대로 실감이 안되는 것이 바로 전사요, 전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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