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36 구축전차와 한국전
상태바
M36 구축전차와 한국전
  • 이승준 기자
  • 승인 2019.11.25 17: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육군 M36 구축전차의 제 2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의 활약

미육군 잭슨 M36 구축전차

제2차 세계대전사와 전차에 관심이 많은 분들 중에는 구축전차( Tank Destroyer, Jagd Panzer, 驅逐戰車 )라는 차종을 보면 흔히 독일의 돌격포나 야크트 판터/티거, 혹은 Ⅳ호 구축전차를 쉽게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구축전차라는 차종은 독일 뿐만 아니라 소련과 영국, 그리고 미국도 운용했고 특히 소련과 더불어 2,000대 이상씩 대량으로 생산해 투입한 미국의 경우 고정 전투실에 대구경 주포를 장착하는데 그친 독일/소련과 달리 회전 포탑을 채용해 보다 능동적인 대응이 가능하다는 이점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군의 구축전차 중 가장 강력한 성능을 자랑한 것이 바로 M36이다.

흔히 “잭슨”( Jackson )이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M36은 이전까지 미군이 투입한 구축전차와 달리 대공포를 기초로 개발된 M3 90mm 포를 이용하여 독일의 Ⅳ호 전차는 물론 맹수로서 공포의 대상이었던 판터와 티거까지 상대할 수 있어 미군 전차병들의 든든한 희망으로 자리잡음은 물론 한국전쟁에서는 한국군 최초의 기갑전력으로서 소년 전차병들과 더불어 전쟁 말기의 고지 쟁탈전에서 강력한 화력지원을 통해 맹활약을 펼쳤다.

 

맹수를 잡아라! M36의 태동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기갑부대의 전술은 알려진 바처럼 전차는 보병을 지원하며 돌파구를 확보하되 반격 출동하거나 공세의 첨병으로 나선 적 전차는 구축전차로 제압한다는 다소 이론상으로는 완벽할 수 있어도 전장의 현실과는 거리가 좀 떨어진 방식이었다.

이러한 전술로 등장한 미군 구축전차 M10/M18은 M4셔먼 초기형의 75mm 주포보다는 강력한 M1 76.2mm 포를 탑재하여 독일군의 Ⅲ호나 Ⅳ호 전차를 상대하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이 차량들이 실전 투입되던 1943~44년의 전장은 이미 판터나 티거와 같은 맹수가 주력으로 군림하던 시기였고 당연히 500m 이내의 근접거리가 아닌 1km 이상의 원거리 교전이라면 보다 높은 명중률과 조준체계를 갖춘 독일 전차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미군 역시 이러한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지한 상태였고 그 결과 구축전차의 화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강구하여 90mm M1 대공포를 활용하는 안건이 상정되었다.

독일이나 소련이 대공포를 개량해 전차 혹은 대전차 자주포/돌격포에 탑재했듯 미군 역시 이런 방식을 채택하여 곧 차량 탑재에 적합하게 개량된 M3가 채용되었다.

M3는 대공포를 기초로 한 만큼 높은 초속과 우수한 장갑판 관통능력과 꾸준히 개량을 거듭한 조준체계 및 신형 철갑탄 덕분에 그 때까지 연합군 최강의 주포로 활약한 영국의 17파운드포를 상회하는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물론 1943년 말엽부터 서서히 배치가 시작되고 있던 티거Ⅱ에게는 다소 열세를 보일 수 있었지만 수적으로 주력인 판터와 티거를 그나마 정상적인 교전거리에서 상대할 수 있어 M10 구축전차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미군 구축전차대대에는 구세주 였다.

미군은 이 포를 탑재할 차체를 물색하는데 큰 고민이 없었는데( 당장 물밀듯 밀려드는 소련 전차부대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던 독일처럼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 바로 M10을 그대로 전용하면 되었다.

물론 주포가 확연하게 다른 만큼 포탑을 새롭게 설계해야 했지만 신형 구축전차는 여러 면에서 기존 M10보다 유리한 측면이 많았다.

일단 포탑이 더 커진데다 차체의 무게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후부에 설치한 돌출부에 11발의 포탄을 적재할 수 있게 되면서 장전수의 재장전 시간 단축에 적잖은 도움이 되었고( 물론 오늘날 탄약 유폭 등의 문제로 이런 식의 포탄 적재는 가급적 실시하지 않는 편이지만 ) M10에서는 수동으로 실시되었던 포탑 회전 방식이 동력 선회방식으로 변경되면서 포수에게 주어지던 부담까지 줄어들게 된 것!

특히 이 차량이 완성되던 시기는 미군의 연료 보급체계가 어느 정도 안정되던 시기로 M10처럼 디젤 엔진과 달리 가솔린 엔진을 사용하던 육군 전차부대와의 급유 체계 혼선이 발생하던 문제가 약간이나마 감소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미군만이 가능한 기적일 듯 싶다. 연비도 떨어지고 친환경적이지도 않은데다 특히 출력 대비 토크에서 열세인 가솔린 엔진은 오늘날 어지간한 국가의 기갑차량에는 잘 채택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

따라서 신형 구축전차는 기존의 M4A1, M4A3에 주로 탑재된 8기통 450마력의 포드 GAA를 주력으로 운용해 연료 보급체계의 혼선이 다소 감소될 수 있었다.

물론 연비가 다소 떨어져 항속거리는 240km에 불과했지만 미군의 막강한 군수지원체계 덕분에 연료 부족으로 멈춰서는 일이 잦은 독일과는 판이한 상황을 보여줬다.

문제는 M36의 생산이 초반에 차질을 빚다보니 부랴부랴 GM의 375마력 디젤 엔진을 탑재한 기존 M10의 차체까지 전용했다는 점이다.

이미 6,706대라는 막대한 양이 생산되다 보니 여유 차체가 남아있던 M10이었기에 가능한 일로 당시 미군 구축전차대대의 급박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군은 500대라는 소수만 발주하고 끝나려 했던 M36의 발주를 추가할 수밖에 없었고 2종류의 변종이 등장하니 그것이 바로 B1과 B2다.

M36B1은 날이 갈수록 급격히 늘어나는 전선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우선 수량에서 여유가 있는 M4A3 “셔먼”의 차체를 전용해 그랑 블랑 아스널( Grand Blanc Arsenal )사에서 1944년 10월~12월까지 생산한 형식으로 총 187대가 출고되었다.

M36B2는 워낙 급하다 보니 디젤 엔진을 운용하는 M10의 차체를 그대로 전용했다.
이 차량은 약 287대가 생산되었지만 기존의 M36 생산량 1,298대는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M10A1의 차체를 이용했다.

 

M36의 전선투입과 활약

M36 구축전차의 최초 실전 투입은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에 성공한 이후인 1944년 9월 무렵으로 서부전선 및 동부전선에서 독일 기갑전력이 사실상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시기였다.

따라서 미군 입장에서는 기존의 M10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사정은  전혀 달랐는데 우선 전선이 독일 본토와 가까워지면서 방어전에 유리한 티거와 티거Ⅱ와 같은 중전차들과의 거리가 좁아졌다는 점이었다.

더욱이 진격에 ‘열’을 올려야했던 연합군으로서는 보급로가 그만큼 길어짐은 물론 진격의 첨두에 선 M4A1이나 M4A3 “셔먼”이 높은 손실을 입을 상황에 처했고 마켓 가든 작전을 통해 이러한 위기가 점차 현실로 드러나자 미군은 당장 투입이 가능한 M36을 집중적으로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 전선에 투입된 M36이 활약한 대표적인 전투는 바로 “발지 대전투”인 독일군의 아르덴느 공세 기간으로 강력한 90mm 주포를 이용해 판터를 비롯한 다수의 독일 전차를 효과적으로 격파하여 공세를 좌절시키는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지붕이 전혀 없는 상부 개방형 포탑 및 전방 기관총의 부재로 인해 보병의 근접 기습공격에 취약하다는 점과 전차보다 약한 장갑으로 인해 발각될 경우 일격에 격파당하는 등 구축전차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전쟁에서 M36 구축전차의 활약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전으로 끝난 이후에도 M36의 추가 생산은 지속되어 총 생산대수는 모든 형식을 합쳐 1,772대라는 만만치 않은 수준에 이르렀지만 M26 “퍼싱”을 비롯한 차기 전차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있었다.

일단 대전 기간을 통해 독일의 강력한 전차부대를 맞아 고전을 겪었던 미군으로서는 구축전차대대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전차의 화력과 장갑을 강화하는 것이 더 유리했고 그 결과 부대가 해체되며 잉여전력이 되어버린 M36을 비롯한 각종 구축전차들을 우방국에 공여하거나 예비 차량으로 보관하게 되었는데 이 중 약 198대가 한국군에 공여되어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다.

잘 아시다시피 한국전쟁 초반 북한군의 T-34/85 쇼크로 한국군은 전차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이를 공급해줄 수 있는 미군은 자신들이 쓰기에도 벅찬 상황이었고( 오죽 차량이 부족했으면 기념물로 전시했던 M26 “퍼싱”까지 끌어내려 재생해 투입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 결국 전차급까지는 안되더라도 T-34/85를 화력으로나마 제압할 수 있는 M36이 선정되었다.

이 때 공급된 M36은 전차와 같은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탓에 전방 기관총 마운트가 추가되는 개수를 거친 차량으로 기본적으로는 M36과 차이는 없으나 원래와는 약간 다른 경우가 되었다.

1951년 10월 15일, 부산항에 하역된 22대의 M36으로 육군 제51 전차중대가 창설되면서 총 9개 전차중대가 전선에 배치되었다.

개전 초반, M8 장갑차 27대로 시작했던 한국군 기갑부대는 이제 완전한 전차는 아니지만 공격력에서는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선에 투입된 M36은 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된 제53 전차중대( 중대장 : 조칠성 대위 ) 소속 차량들이 후방에서 제9 보병사단을 화력 지원함으로써 중국 인민지원군 제38군의 파상 공세를 격퇴하고 거점을 사수하는데 일조하는 등 나름대로 전과를 거두었다.

 

M36과 소년 전차병

한국전쟁 기간 중 활약한 M36 구축전차와 함께 자신을 희생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소년 전차병들이다.
전쟁은 항상 인원 부족이라는 한계점에 봉착하게 되고 따라서 한국군으로서는 기존 징집대상인원만으로는 전투 수행이 어려워 그 대상을 하향조정했는데 특히 적잖은 학습능력이 요구되는 전차병과에 맞는 젊은 청년들을 우선적으로 징집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전장이 현재의 휴전선 일대로 축소되고 양측의 지리한 대치전과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1952년 4월, 병무청의 모병관들은 날이 갈수록 인원 부족이 속출하는 기술병, 그 중에서도 차후 군의 주축이 될 전차병들을 모집하기 위해 전국의 중·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상대로 입영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쟁이 끝난 이후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엘리트의 길을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지만 “하사관으로 임관해 일본에 6개월 동안 기술 교육연수를 보내주겠다”는 모병관의 설명에 많은 학생들이 자원해 이 중 120명을 선발했다.

문제는 막상 입대하고 나니 이들 120명이 하사관도 아닌 일반 병사 신분으로 논산의 제2 훈련소에서 보병 기초 교육훈련만을 수료한 뒤, 광주의 육군 보병학교 전차 교육대로 이동하여 3개월의 후반기 교육훈련을 이수했다는 점이다.

졸지에 모병관의 감언이설에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학생들이지만 이왕 선발된 김에 끝까지 해보자는 신념으로 혹독한 전차병 훈련을 마치자 마침내 10월 25일, 소년 전차병 제1기이자 육군 보병학교 전차 교육대 7기 수료식이 거행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유명한 “소년 전차병”이다.

당시 평균 17~18세의 어린 학생들이었던 소년 전차병들은 약속했던 일본 교육연수 및 하사관 임관을 하지 못한데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묵묵히 자대 생활을 해나갔다.

수료식 이후 1주일 간의 휴가를 얻어 집에 다녀온 소년 전차병들은 11월 초, M36 구축전차 22대와 M32 구난전차 1대를 수령해 본격적인 운용 훈련에 돌입했다.

1952년 11월 15일, 이들 소년 전차병을 주축으로 한 제57 전차중대가 창설되면서 지속적인 적응훈련을 실시한 끝에 부대원들의 숙련도는 대폭적으로 향상되었고 12월에는 치열한 전장에서의 다급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57 전차중대의 전선 투입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전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당시 제57 전차중대는 중대장 박우춘 대위를 포함한 7명의 장교와 소년 전차병 120명으로 편성되었는데 총 4대 소대로 분산되어 육군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를 화력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위기는 있었으니 언급한대로 구축전차이자 상부가 개방된 M36의 특성상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박격포 사격에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소년 전차병들은 위험을 무릅써가며 아군의 고지 쟁탈전에 대한 화력 지원을 수행해야했고 이렇게 주간에 발사된 90mm 포탄 세례로 인해 중국 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53년 3월, 유명한 김만술 상사의 베티 고지 쟁탈전 기간 중 중국 인민지원군의 맹렬한 박격포 공격으로 M36 2대가 피격돼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소년 전차병들이 이에 굴하지 않고 사격을 지속한 결과 중국 인민지원군은 다시금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격퇴되었고 뒤이은 노리 고지 쟁탈전에서도 이들의 활약이 지속되었다.

이런 격전의 와중에 소년 전차병들의 야전생활은 고난의 연속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혹독한 겨울에는 차량이 올라오기도 힘든 고지 정상부에서 M2HB 중기관총용 탄통에 쌀을 씻어 밥을 지어먹으며 주간에는 화력 지원을, 야간에는 야음을 이용해 전차를 급습하려는 적을 경계하기 위해 잠도 제대로 못 이루는 생활이 연속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고난을 극복하며 끝까지 싸운 이들 소년 전차병들의 활약으로 휴전 직전까지 서부전선은 안정되었지만 휴전을 불과 2개월 앞둔 1953년 5월, 264 고지 전투에서 제1 소대장 박승일 소위가 적탄에 피격돼 전사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53년 7월, 휴전으로 분계선이 다시 설치된 이후 제57 전차중대는 해체돼 일부 소년 전차병들은 그대로 군에 남아 간부가 되었지만 전역한 이들은 전쟁 기간 중 전차병의 고된 후유증으로 인해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공부를 포기하고 스스로 전차병이 되어야 했지만 정작 국가는 이들의 희생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보상은 찾아온다는 말처럼 지난 2005년 5월, 제28 보병사단 관할인 태풍 전망대에서 소년 전차병 생존자들이 주축이 되어 박승일 소위의 추도식이 열리고 기념비가 세워지는 등 국가를 위해 살신성인의 정신을 보여준 이들의 활약에 대한 작은 보상이 실현되었다.

M36은 대전 기간 중 미군이 운용한 구축전차 중 가장 강력한 화력을 보유한 차량으로 전장 투입이 늦어 독일 전차를 상대로 큰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당초 소수만 발주되고 끝날 예정이었던 것을 단숨에 4배 이상으로 대량 생산되었다는 점에서 그만큼 존재가치를 입증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사실 M36이 없었다면 미군 입장에서는 강력한 맹수들을 보유한 독일군에게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또한 전후 주요 우방국에 공여돼 한국군처럼 혁혁한 전과를 거둠은 물론 유고슬라비아 내전에도 투입되어 T-34/85와 T-55를 상대로 치열한 격전을 치른 점은 전차까지는 안 되더라도 화력이 동등할 경우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사례를 입증한 경우다.

 

M36 구축전차 제원

전장 : 7.46m
전폭 : 3.05m
전고 : 3.28m
중량 : 29톤
승무원 : 5명
주무장 : M3 90mm 주포×1( 포탄 47발 )
부무장 : M2HB 12.7mm 중기관총( 탄약 1,000발 )
엔진 : 포드 GAA 8기통 450마력 가솔린( M36 )
항속거리 : 240km
최고 속도 : 시속 42km
생산대수 : 전후형 포함 1,772대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미육군)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미육군)
(사진: 디펜스 투데이)
(사진: 미육군)

[디펜스투데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